도시계획 수정·보완 8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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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울은 세계에 유례없는 급속 인구팽창과 그에 따른 초 거대화로 줄달음쳐왔다.
따라서 도시계획의 흐름도 덩달아 세찬 변천을 거듭했고 도시계획담당자의 자리도 하루가 다르게 격상되며 흐름을 같이했다.
서울시 도시계획은 1949년의 2백69평방km에서 1963년 3백28, 1973년6백27평방km로 세 차례에 걸쳐 면적을 넓혀가며 기본계획도 8차례나 크고 작은 수정·보완이 이뤄졌다.
5·16 군사쿠데타직후 본격화된 서울의 도시계획은 ▲60년대 시가지골격조성 ▲70년대 강남개발 등을 통한 부 도심확장 및 인구분산 ▲80년대 전철·도로망구축에 따른 도시기능 분산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아쉬운 점은 강북을 중심으로 이미 대도시로의 발돋움이 시작된 자유당 말기까지도 이렇다할 도시계획이 없어 오늘날 강남북 불균형을 초래한 점이다.
형식상 서울에 도시계획이 처음 세워진 것은 일제 때인 l936년.
1934년6월 공포된 조선총독부 제18호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따른 첫 계획은 4천만평의 계획구역에 대한 가로망·공원계획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방행정청의 재량권도, 예산도 거의 없어 흐지부지 해방을 맞았고 계획자체도 당시 64만명의 인구가 계획기간이 끝나는 1966년에 1백10만명으로 늘 것으로 예상돼 세워졌으나 해방직후 이미 1백10만명을 돌파, 쓸모 없이 돼버렸다.
1962년 군사혁명 위의 도시계획법 공포 및 서울시 도시계획 국 신설로 독자적 행정운영권을 크게 확보한 시는 장래인구 5백만명을 기준으로 「도시계획백서」를 내고 이를 토대로 1963년4월 두 번째 수정된 기본 계획을 만들어 본격 채비에 나섰다.
▲한강 이남 등 교외 지역개발 ▲한강 하천부지 매립. 택지조성 등이 골자로, 60년대 중반까지는 여건상 도로 등 토목분야가 주종.
1964년 시작한 구로공단 조성사업이 다소 특이한 것이었다.
「한강의 기적」이란 자찬과 함께 오늘날 서울 모습의 틀을 닦은 강남개발은 「불도저」김현옥 시장의 1966년 8월 대 서울 도시 기본계획에 따라 시작된 대 역사로 평가된다.
1968년 시작되 70년대로 이어진 영동개발은 대상면적 8백여 만평으로 세계구획정리 역사상 최대 광역개발로 기록됐다.
또 잠실섬 남쪽 한강줄기를 메우며 1970년부터 시작된 4백70만평 잠실구획정리사업은 광활한 뽕나무밭을 10여년 만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석촌호수·상가·종합운동장이 들어선 부도심권으로 바꾸어 놓았다.
1967년 말부터 시작된 여의도 개발로 백사장·채소밭이었던 2백50만평의 불모지는 국회의사당과 10∼63층까지의 대형건물 1백50여개가 들어선 맨해턴으로 변모했다.
청담·압구정동 일부와 잠실·구의지역, 난지도를 쓰레기로 매립, 쓰레기처리와 동시에 단지조성의 효과를 얻은 것과 목동개발, 올림픽대로 등 강변도로 건설도 서울시 도시계획의 성공사례로 평가된다.
실패작으로는 강북지역의 동서흐름을 가로막은 동양 최대의 재개발상가아파트 세운상가의 건립과 도심슬럼화를 초래한 청계 고가차도 건설 등이 꼽힌다.
또 명동공원·수표공원을 없앤 것이나 유통·위락·숙박시설을 한꺼번에 수용해 엄청난 교통유발을 야기한 잠실롯데 월드 조성, 낙원상가 등도 전문가들로부터 졸작이란 평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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