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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6천여 장서 보관 '한국 최초 전직 대통령 기념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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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전직 대통령 기념관인 ‘김대중 도서관’이 지난 3일 문을 열었다. 통일학 연구소 성격의 전문도서관이다. 아태재단을 둘러싸고 갖가지 잡음이 나오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올해 초 아태재단 건물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각종 자료와 함께 연세대학교에 기증함으로써 이 도서관이 탄생했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金 전 대통령 자택 바로 옆에 위치한 이 도서관을 지난 5일 꼼꼼히 살펴보았다. [편집자 주]

오전 10시쯤 도서관에 도착하니 개관식 때 들어온 화환들을 바깥으로 내놓느라 다소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이틀 전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3백여명의 유명 인사들, 그리고 취재진들로 법석대던 잔치집의 분위기는 이미 간 데 없었다. 개관한 지 며칠 안 된 데다 온 나라의 관심이 대입 수학능력고사에 집중된 탓인지 이용객 하나 없이 한적했다. 골목길에는 김 전 대통령의 자택 경호원들만이 기자를 경계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서관 안에 들어섰을 때 마침 이희호 여사가 비서 및 경호원과 함께 입구 근처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보였다. 자택과 이어진 도서관 로비의 비상 출입구를 통해 들어온 것이었다. 얼핏 보았지만 李여사의 건강 상태는 좋아 보였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3층·지상 5층 규모의 이 건물 5층에 멈췄다. 金 전 대통령의 전용 공간이다. 독서와 집필, 그리고 방문객 접대가 가능하다고 한다.

로비의 경비 담당 강종기(60)씨는 “어제만 해도 30여명의 일반인들이 왔었는데 오늘은 아직 아무도 안왔다”고 말했다. 개관 후 1호 방문객은 60대 할아버지라고 했다. 4일 오전 10시쯤 와서 한참을 둘러보다 갔다고 한다. 50~60대 방문객이 많았고, 부부가 함께 온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도서관은 연세대 중앙도서관의 기준에 준해 개방되기 때문에 사실 일반인들의 출입은 통제된다. 사전에 도서관장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직접 찾아오는 손님까지 돌려보내기 미안해 1층 전시물만 둘러보게 하고 있단다.

1층 로비 중앙엔 호암아트홀에서 열렸던 노벨상 1백주년 기념전 때 선보인 금속 월계수 나무가 서있고 둘레에는 노벨상 관련 사진들과 동영상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열람실엔 金 전 대통령이 기증한 일반 서적들이 주제별로 정리돼 있다. 『끝나지 않은 노래』『존 레논』『통일 가요집』등 대중문화서와 영어학습서·건강서들도 눈에 띄었다. 요가 관련 서적은 제법 누렇게 손때가 묻어 있었다.

서가 한켠에는 고 아키노 전 필리핀 상원의원이 사용했던 수동 타자기와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이 선물한 손목시계 등이 전시돼 있다. 어느 할머니가 李여사에게 직접 만들어 선물했다는 고운 빛깔의 골무 세트가 전시대를 화사하게 만들고 있었다.

2층 열람실엔 통일관련 서적 및 자료들과 각종 사진·오디오·비디오물을 모아 놓았다. 70년대 감금돼 있을 때 李여사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쓰는 데 사용했다는 대못과 지난 95년 남북정상회담 때 사용한 펜을 비교하듯 나란히 전시해 놓은 것도 눈길을 끌었다. 정상회담을 대대적으로 1면에 보도했던 당시 일간지들도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3대 일간지로 꼽히는 중앙·조선·동아일보는 없었다. “각 사에 모두 자료를 요청했는데 요즘엔 PDF를 이용해 자료를 보관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신문이 없다고 했다. 그나마 보관용으로 철해 놓은 것을 보내준 신문사들 자료만 모아놨을 뿐, 다른 의도는 없다”는 것이 전시 담당 정진향씨의 설명이다.

2층 열람실 한쪽에는 A/V실도 있다. 오디오 자료 중엔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기자회견을 녹음해놓은 테이프에서부터 83년 뉴욕 성 마이클교회에서 신앙간증을 한 내용인 듯한 녹음 테이프도 있었다.

1·2층에 진열된 책들은 1만6천여권이다. 대통령 부부에게 책을 헌사한 유명 인사들의 친필이 담겨있는 등 그 자체로도 의미를 찾을 만한 자료들이다. 대통령의 메모가 담긴 책들은 좀더 사료적 가치를 평가받기 위해 빼놓았다고 한다. 분류도 좀더 자세히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연세대측에서 아직 사서를 배치해주지 않아 조금 늦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 3층은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원이, 4층은 객원연구원들을 위한 연구실과 사무국이 들어와 있다. 연세대와는 통일학 협동 과정을 개설, 내년 3월부터 석사 과정을 시작할 계획이다. 도서관 지하 2·3층은 주차장, 지하 1층은 컨벤션홀이다.

사실 아태재단 건물은 원래 사무실용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도서관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책들로 인한 하중이 문제가 됐다. 신동천 통일연구원장 겸 도서관장(경제학 교수)은 “열람실이 다소 휑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다. 구조검사에만 두 달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1층을 완전히 리모델링하고 3층을 연구실로 개조하는 데 4억원 이상 들었다고 한다. 앞으로 자료가 더 들어오면 보강공사가 필요할 것 같단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다 李여사와 또 한번 마주쳤다. 정진향씨에게 따르면 李여사는 이날 金 전 대통령 퇴임 후 8개월 만에 처음으로 청와대 시절 자료들을 보러 들렀다고 했다. 5층에 작은 방 하나를 李여사 전용으로 만들겠다고 건의했다가 李여사가 괜찮다고 해서 일단 李여사의 것인 듯한 물건과 자료들을 창고처럼 쌓아놓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 들러 일일이 자신의 것인지 확인한 뒤, 아무래도 집필실이 따로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던지 의자에도 앉아보고 갔다는 것이다. 金 전 대통령도 전날 들러 전시물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새 방문객이 있었다. 남학생들이 노벨상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신림중학교 3학년생인 이들은 수능시험 때문에 휴교일이라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한 학생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해 궁금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과연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1층 열람실에도 60대의 노부부가 와 있었다. 남편인 오순모(62·서울성북구돈암동)씨는 “평소 존경하던 분인데, 한 때 국민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듯 해 안타까왔지만 이 김대중 도서관의 개관으로 다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며 金 전 대통령의 손때가 묻은 책들을 한 권 한 권 유심히 살펴보았다.

오전 11시 반쯤 도서관을 나섰다. 정진향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 시 자료들을 모두 들고 가버린 것에 문제를 느끼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부 기록물 관리법을 강화했다. 그런데 이번에 기념관을 만들면서 보니 이것에 오히려 발목이 잡혀 국민의 정부 시절 자료는 미미한 편이다”라면서 “미국처럼 주요 자료는 국가에서 관리하더라도 金 전 대통령에 대한 웬만한 것들은 이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金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이들은 그분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하나에도 관심있어 한다”면서 “투어 프로그램 등을 마련해 일반인에게도 부분적으로나마 개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운영=공식적으로 연세대 부속기관으로 됐기 때문에 사서 인사 문제에서부터 자료관리, 재정까지 연세대의 몫이다. 도서관 운영 관련 실무는 10인의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는데, 8명의 연세대 교수와 2명의 기증자측 인물로 이뤄져 있다. 현재 김한정 비서관과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金 전 대통령측에서 참여하고 있다.

신동천 도서관장은 “일단 연세대에서 운영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미국식으로 후원금과 기부금을 통해 부분적으로 충당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에 기증했던 노벨평화상 상금(스웨덴화 9백만 크로네, 한화로 약 10억원)은 아태재단이 해체하면서 "더 좋은 곳에 사용하겠다"며 金 전 대통령이 반환받아 보관 중이다. 김한정 비서관은 "아직 이 돈의 구체적인 용처는 정해지지 않았다. 金 전 대통령께서 구상 중이다"라고 말했다.

◇이용메모=이용시간은 평일 오전 9시~오후 5시, 토요일은 오전 9시~12시다.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출입 및 대출 자격은 연세대 중앙도서관의 기준이 적용된다. 즉 대출은 연세대생만, 출입은 연세대 및 신촌 3개 대학(이화여대·홍익대·서강대)생의 경우 학생증만으로 가능하다. 타대학생은 해당대학이 발급한 자료열람 추천서가 더 필요하다. 전문연구기관 소속원은 신분증과 재직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다. 일반인은 신분증을 가지고 도서관장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문의 02-2123-4892~6. 홈페이지(www.kdjlibrary.org)는 아직 내용을 준비 중이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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