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 흔드는 「부패 불감증」/김영배(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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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수서의 인위적인 조기종결은 참으로 위태로운 체제논리와 부패무감각 증세를 드러내주고 있다.
수사에 대한 미흡함을 지적하는 소리가 높고 새로운 의혹이 나타나고 있는데도 검찰의 수뇌는 『소문에 따라 수사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야당으로부터,그리고 민자당 당내 일각에서 국정조사권 발동요구가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대해 민자당의 고위 당직자라는 사람은 『검찰 수사중에 국회가 조사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유언비어를 더 확대시켜 혼란만 가중시킨다』고 거부했다.
검찰과 당의 주장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여당의 축소수사 주장은 「체제위기론」을 근거로 삼고있다.
그러나 그것이 수서사건을 열흘 남짓의 조사로 마무리짓는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서사건은 어쩌면 체제의 붕괴위험을 미리 알리는 역신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토록 종결을 서두르고 여당이 함구일관하고 있는데 대해 대부분의 국민은 이 사건이 청와대나 여권의 심층부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야당도 「검은 로비자금」에 연루되어 있고 언론조차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체제의 위기는 정부·여당의 부패혐의에 대한 철저한 조사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부패혐의의 은폐의혹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미 많은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거창한 의혹을 청와대의 1급비서관이 할 수 있었겠느냐,한보의 비자금은 왜 조사하지 않나,한보에 대한 지나친 구제금융에는 배경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 등이다. 외압설,거액의 정치자금설 등도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 「유언비어」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해명이 요구되는 몇가지 사항들이 있다.
수서사태가 처음 터졌을때 정부내의 일치된 의견은 『법적인 문제점이 없다』는 인식으로 나타났었다. 청와대가 그렇게 주장했고,총리실도,검찰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특별감사 이틀만에 수서택지의 특별공급은 위법으로 드러났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청와대나 정부 관계부처,검찰의 최초 법적 인식의 근거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청와대 일개 비서관의 「압력」에 당정이 모두 굴복하는 체제라면 이건 정말 위태로운 체제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이번 사건의 수사에 타임테이블이 있었다는 점이다. 검찰조사는 데드라인을 이미 정한 단기조사였다는 여러가지 정황들이 나타나 있다.
너무 짧은 조사기간 때문이었는지 너무 많은 사실들이 조사에서 누락됐다.
청와대에 상부선이 있다는 보도의 허실을 캐기위해 검찰은 그 상부선의 혐의에 오른 두 수석비서관만 조사했다.
그것을 발설한 의원은 서둘러 부인한 뒤 참고인 조사를 받는둥 마는둥하고 말았고,정작 문제의 그 보도에 대한 조사는 없었다.
발설한 의원과 청와대측은 펄펄 뛰며 명예훼손으로 고발한다고 했지만 그런 고발이 있었다는 얘기도 없다.
수서사건은 정·경·관이 유착한 부정·부패의 한 전형적인 축도다.
때문에 이 사건을 계속 파고들어가면 고구마 줄기 캐듯 정·경·관의 부패커넥션이 드러날 것이다.
수서사태를 거기까지 확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체제위기론이요,축소 수사방침인 것 같다. 그 부패의 커넥션이 어디에까지 뻗쳐있기에 체제의 위기가 온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수서사건을 이것으로 억지종결한다면 이 사건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그 은폐기도라고 봐야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부패는 경계수위에 달했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 위험을 알리는 붉은 경고등이 켜졌을때 그것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수서가 보내는 가장 강한 위험경고는 부정·부패에 대한 체제의 취약성이다. 고위공무원·국회의원 어디건 로비에 약했다. 아니 부패가 거의 체질화 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부패 무감각 증세가 모든 곳에 만연되고 있음이 입증됐다.
언론도,검찰까지도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 판국이다. 여당은 최고지도부가 문서에 결재해 놓고도 시치미를 뗐다.
야당은 국정조사권을 소리높이 외치지만 진정코 국회를 열 의사가 있는지 의심받고 있다. 여당은 국정조사권을 반대하는 이유로 국회소집을 반대하고,야당은 여당이 반대할줄 뻔히 알면서 국정조사권 없는 국회는 안된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여야 모두 국회를 열 의사가 없는 탓이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때문에 수서의 조기 종결은 체제의 합작은폐라는 의심을 주고 있다.
이미 부패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수서사건을 계기로 부패를 발본기원하라고 요구한다면 온사회가 소란스러워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부패증세의 악화를 막고 체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미 드러난 빙산의 일각만큼이라도 조사하고 잘라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마저 덮어버리라는 것은 체제의 도덕성을 무너뜨리는 것이며 오히려 체제의 위기를 가중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수서의 은폐시도에서 나타나는 지도층의 도덕적 함몰이야말로 체제의 진정한 위기다.<정치부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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