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쿠데타에 관한한 태국은 우리의 큰 형쯤 된다. 1932년 전제군주제를 뒤엎는 쿠데타가 성공하고 나서 오늘까지 무려 16차례의 정변을 치렀다. 60년 동안 3년여에 한번씩 쿠데타를 맞은 셈이다.
지난 토요일 한낮에 일어난 쿠데타는 14년만이다. 하지만 방콕시내 곳곳에 포진한 탱크들은 긴장의 빛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긴장은 커녕 전투복차림의 군인들은 한가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정도로 태국 국민들의 눈엔 쿠데타가 연례행사의 하나로 비치고 있다.
지난 77년 10월 쿠데타 이후 태국은 제법 민간정부의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군최고사령관 아니면 육군사령관 출신들이었지만 이들은 복수정당제를 허용하고,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등 정치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뚜렷한 다수당이 나타나지 않자 세개의 정당이 어울려 연립정부를 세우는 정치의 묘도 보였다.
그러자니 정계는 혼란을 거듭했고,그 사이 군부는 두차례나 쿠데타를 기도했다. 그래도 정부가 이들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경제개발의 덕이 컸다.
외국자본들이 몰려들면서 태국은 지난 몇년동안 두자리수의 경제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샴만에선 천연가스까지 솟아올라 태국의 경제개발은 가속을 얻는듯 했다. 세계의 매스컴들은 태국이 한국경제를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나라에서 난데없이 쿠데타가 일어났다. 무슨 곡절인가.
첫째는 부정,부패다. 정치혼란은 선거부정을 빚어냈고,부정선거는 필연적으로 정치부패를 연출했다. 군부 또한 부패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형편이었다. 그 나라의 모든 요직은 군장성의 몫이 되어 있다. 그런 현실에서 어떤 장군출신의 부인은 『걸어다니는 보석상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치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정부와 군부의 불신을 자아냈다.
둘째는 인사의 실패다. 내각과 군부의 불화는 적절한 인사배치로 극복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각은 그런 지혜와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셋째는 국민들의 정치 무관심이다. 겉모양이야 어찌되었든 군부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에 국민들은 기대도 관심도 갖지 않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세련된 정치와 오랜 단련의 결과라는 사실을 태국도 교훈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