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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들의 반란 "떼돈 벌기는 커녕 문 닫게 생겼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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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이익 줄었다 주장하며 상표표시제 폐지 요구 등 목소리 높여

▶강남 인근의 주유소들이 사라지고 있다. 사진은 특정 관계 없음.

주유소들이 심상치 않다. 올 하반기 들어 특히 시끌벅적해졌다. 조금만 권익을 침해받았다 싶으면 바로 들고 일어선다. 지난 8월엔 한국주유소협회가 국방부 근무지원단장 등을 군 검찰에 고발했다.

계룡대 등 전국 8개 군 복지관의 자가주유취급소가 법을 어기고 군인·군무원·군속에게 석유 제품을 팔아왔다는 게 고발장의 내용이다. 자가주유취급소는 등록된 차량에만 주유할 수 있을 뿐 판매는 할 수 없다는 법규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10월에는 경남 진해시 주유소협회원들이 시장을 상대로 해군이 부대 안에 설치한 주유소 등록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도 냈다. 지금은 주유소협회가 전국 주유소들을 상대로 ‘상표표시제 폐지를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주유소에 SK·GS칼텍스·S-Oil·현대오일뱅크·SK인천정유 등 표시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법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다. 이 역시 주유소들의 이익과 직접 연관이 있기에 서명 운동을 하는 것이다. 도대체 주유소들이 왜 이러는 걸까?

“연평균 순익 5086만원에 불과”

한마디로 ‘옛날 같지 않아서’다. 이익이 크게 줄었다. “주유소가 떼돈을 번다는 건 한참 전 얘기”라는 게 주유소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휘발유·경유값이 엄청나게 오른 것 같은데, 주유소 마진이 박하다는 게 정말일까? 주유소협회가 조사한 바로는 그렇다.

지난해 평균 규모 주유소 손익계산서

매출 30억7583만원

매출원가 28억4553만원

인건비 6881만원

신용카드 수수료 3531만원

제세공과금 930만원

수도광열비 711만원

수선비 709만원

순이익 5086만원

자료=한국주유소협회

협회는 최근 전국의 ‘평균 주유소’ 52곳의 지난해 손익계산서를 제출받았다. ‘평균 주유소’란 휘발유·경유·등유 등을 합해 전국 주유소 평균 판매량인 한 달 약 1100드럼 내외를 파는 주유소를 말한다. 이런 주유소 52곳의 지난해 손익계산서 평균을 내봤더니 매출이 30억7600만원이었다.

여기서 기름값 원가, 인건비 등 각종 비용을 빼고 남은 돈은 5086만원이었다. 매출의 1.65%만 이익으로 남았다. 이익 비율이 소매업 평균(올 상반기 5.3%)보다 훨씬 낮다. “그래도 5000만원이면 벌만큼 버는 것 아니냐”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유소들의 얘기는 다르다. 서울이 아니더라도 웬만한 도시에 주유소를 열려면 20억∼30억원이 든다. 이 걸 은행에 넣어 놓고 연 4% 이자만 받아도 한 해 1억원 내외의 수입을 올린다. 그런데 애써 주유소를 운영해 그 반밖에 못 버니 차라리 주유소를 팔아치워 돈 싸들고 은행에 가는 게 낫다는 주장이다.

주유소 마진이 박해진 이유는 경쟁이 심해져서다. 1996년 말 1만902개이던 전국 주유소는 올해 10월 말 현재 1만2032개로 늘었다. 거기에다 기름값이 자꾸 오르자 소비자들은 조금이라도 싼 주유소를 찾는 경향이 생겼다. 결국 주유소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가격 경쟁을 벌여야 했다.

실제 주유소들의 손익계산서를 들여다 보면 기름을 사오는 원가가 매출의 92.5%(28억4600만원)다. 바꿔 말해 매출 중 7.5%만이 마진이다. 경쟁 때문에 값을 높여 받지 못하다 보니 마진이 이렇게 박해졌다. 이 7.5%의 마진에서 인건비, 신용카드수수료, 사은품비, 전기·수도료 등을 떼야 한다. 제일 많이 나가는 것이 인건비(평균 6900만원)이고, 다음이 신용카드 수수료(3530만원)다.

주유소들은 신용카드 수수료에 대해서도 입이 나와 있다. 휘발유 판매 가격의 60%를 차지하는 세금에 대해 신용카드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게 불만이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게 ‘정당한 불만’은 아니다. 어느 제품이든 세금에 수수료가 붙는다.

석유제품은 세금 비중이 몹시 높다는 게 문제다. “세금이 가격의 10% 정도라면 모르지만, 휘발유는 60%나 되는데 거기에까지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건 억울하다”는 게 주유소들의 입장이다. 심지어 “세금에 붙는 수수료는 주유소가 아니라 나라에서 받아가라”고 할 정도다.

물론 잘나가는 주유소도 있다. 판매량이 많은 주유소들은 큰 이익을 남긴다. 그러나 그런 주유소는 많지 않다. 앞에서 얘기했듯 전국 주유소의 월 평균 석유제품 판매량은 1070드럼. 그런데 판매량이 평균보다 적은 1000드럼 미만 주유소가 전체의 80%다. 2000드럼 이상 판매 주유소는 10%가 채 안 된다. 주유소도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제살 깎는 과당경쟁이 원인

주유소들이 들썩거리며 지금 벌이고 있는 ‘상표표시제 폐지를 위한 서명 운동’의 목적은 조금이라도 이익을 늘려보자는 것이다. 특정 정유사 표시를 달지 않고 그때그때 싸게 주는 정유사 기름을 받아 팔겠다는 속셈이다. 주유소로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이익이다.

이에 대해서는 “상표표시를 하지 않으면 특정 정유사 제품을 원하는 고객의 권리가 침해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주유소 업자들은 “A사 표시를 단 주유소에 B사가 기름을 공급하는 등, 이른바 정유사 차원에서도 ‘맞바꾸기’를 하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그럴 바엔 표시를 달지 않고 싼 기름을 싸게 파는 게 소비자들에게도 이익”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주유소 마진이 줄어드는 데 대해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값싼 유사 휘발유 등을 섞어 팔려는 유혹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난 6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는 산업자원부·석유품질관리원·지자체·정유사·주유소·소비자 단체들이 모여 ‘유사 석유제품 추방 대국민 결의대회’까지 한 상황이다.

서울에서 주유소가 줄었다

땅값 비싼 강남에서만 33% 사라져

마진이 박해지다 보니 서울에 주유소가 줄어드는 현상도 나타났다. 1996년 말 886개였던 서울의 주유소는 현재 706개로 줄었다. 10년 새 5분의 1이 사라졌다. 비싼 땅값 때문이다. 서울에서 주유소를 하려면 도로변 상가지역의 땅 300평 정도가 필요하다.

서울의 도로변 땅이라면 강남이 아니라도 평당 2000만∼3000만원은 쉽게 넘어간다. 300평이면 60억∼90억원이다. 마진이 줄면서 이렇게 비싼 땅의 임대료도 대기 버거워진 게 서울의 주유소가 감소한 이유다.

특히 땅값이 비싼 서울 강남구는 2002년 초 79개였던 주유소가 3년 사이인 지난해 말 58개로 27% 급감했다. 개인이 운영하는 주유소가 많이 문을 닫았다. 강남의 정유사 직영 주유소는 2002년 초 27개에서 지난해 말 23개로 4개가 감소한 반면, 개인이 운영하는 주유소는 같은 기간 52개에서 35개로 17개(33%)나 사라졌다. 자영 주유소의 3분의 1이 문을 닫은 것이다.

대기업이 주유소를 없앤 사례도 있다. SK주유소를 운영하는 회사인 SK네트웍스는 서울 여의도역 네거리 귀퉁이의 주유소를 헐고 그 자리에 고급 오피스텔을 짓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비싼 세금을 내면서 주유소를 계속 운영하는 것보다 오피스텔을 지어 분양하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숫자가 자꾸 줄어든 덕(?)에 서울 지역 주유소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은 이익을 내고 있다. 주유소협회에 따르면 서울 평균 주유소(월 판매량 1100드럼 내외)의 지난해 순이익은 8245만원으로 전국 평균인 5086만원보다 60%가량 많았다. 매출은 서울이 32억2400만원, 전국 평균이 30억7600만원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권혁주 중앙일보 경제부문 기자 woo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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