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나침반] 외주제작, 진정한 독립의 길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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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높은 외주 제작프로를 뽑는 '제4회 독립제작사협회(KIPA)상' 심사를 맡으면서 방송에서 독립이 갖는 의미를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독립의 열매는 자유.자율.자결인데 과연 독립제작사들은 창작과정에서 얼마나 자유롭고 자율적이며 또한 얼마만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까.

독립했지만 여전히 칼자루는 딴사람이 쥐고 있다면 그건 '무늬'만 독립이다. 곳간 열쇠는 남이 갖고 있고 헛간 열쇠만 지니고 있다면 그것도 안쓰러운 일이다. 지금 칼자루와 곳간 열쇠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갖고 있다. 독립제작사들이 저예산 고효율, 즉 돈 덜 들고 시청률도 나쁘지 않은 프로그램 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방송사의 눈치를 보며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번 출품작들도 대체로 돈보다는 시간을 길게 투자해 만든 작품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지난 9월 초 5부작으로 방송된 인간극장 '광화문 연가'(제작 리스프로)는 연출을 맡은 김우현 PD가 10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촬영을 해오던 인물이 소재다. 거리의 떠돌이로 무위도식하던 한 뇌성마비 청년이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가치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6㎜ 카메라 특유의 섬세함으로 포착했다.

다큐서울의 정수웅 감독이 연출한 '최승희 탄생 90주년 2부작' 역시 거의 10년에 걸쳐 세계 각국을 돌며 모은 자료들과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육성증언을 엮어 만든 땀의 발자취다.

독립군에게는 오기나 객기보다 패기와 끈기가 필요하다. 개성적 특화만이 살 길이요, 나아갈 길이다. 명창 박동진옹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인생을 추적한 다큐를 십년에 걸쳐 만든 독립제작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현대사를 증언할 많은 영웅들을 신문의 부고(訃告)란에서나 만나게 돼서는 곤란하다는 걸 미리 착안한 제작사는 혹시 없는지 궁금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대로 승리하기 위해선 힘(실력)을 키워야 한다. 일부 연예기획사가 방송사를 상대로 마주앉아 '협상'을 벌이게 된 까닭은 그들이 능력 있는 대중적 스타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독립제작사들도 시청자가 학수고대하는 프로를 생산할 역량 있는 스타 PD를 키우고 보유해야 한다.

고장석 독립제작사협회장은 방송 3사의 시장독점을 완화하고 재능을 갖춘 예비 방송인에게 문호를 개방할 수 있으려면 편성전문 TV인 이른바 제4채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만 되면 방송 콘텐츠 개발에도 기여하고 창의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외국의 예를 들어가며 강조했다.

독립에도 절차가 있다. 이제 방송사들도 말로만 공영.공익을 외치지 마라. 우선 독립제작사의 작품선정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하자. 취업박람회 하듯이 기획안 박람회를 자주 열어서 참신하고 흥미롭고 시청자에게 도움되는 프로들을 방송사끼리 경쟁적으로 구매하라. 그런 일 아니라도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손을 내젓지 마라. 그 손의 칼자루, 아니 곳간 열쇠는 누가 주었는가.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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