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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쓴 편지] 영화 '굿바이 레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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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사랑하는 아들 앨릭스에게.

아들아, 이곳 하늘나라에서 엄마는 편안하단다. 네가 우주선 모형에 내 재를 하늘로 날려 보낸 날, 엄마는 아름다운 통일 독일의 하늘에서 불꽃으로 피어올라 세상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축복을 줄 수 있었지. 아들아, 네가 그렇게 원치 않았던 통일에 대한 진실을 엄마는 알고 떠났단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라. 엄마는 진실에 충격을 받아 떠난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잠들어 있던 동안 조국에서 벌어졌던 '사실'과, 또 그것을 숨겨왔던 너의 눈물겨운 거짓말에 담겨진 마음을 모두 안고 떠나 행복했단다. 내가 조국에 일어났던 일들을 '진실'이라 하지 않고 '사실'이라 하는 것은 네가 그것을 숨기려 했던 노력, 그 안에 담겼던 마음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란다.

거짓말이라면 네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나에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숨겼던 것에 못지 않게 엄마가 너희들에게 했던 거짓이 더 크지. 여자 때문에 서독으로 갔다던 아빠가 실은 자신의 선택으로 망명을 했다는 사실, 이걸 숨기려고 엄마가 열성적인 사회주의자로 살았다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너희를 속이고 스스로를 속인 것이겠지. 그러나 후회는 없단다. 아빠의 뒤를 따르지는 못했지만 너희들을 위험에 처하지 않게 했고 열성 당원으로 살면서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이 땅이 올바른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그래, 내가 깨어나자마자 동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충격을 받았겠지. 그건 평생 동안 정열을 바쳤던 체제와 이념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 자본주의의 달콤한 열매 뒤에 펄럭이는 코카콜라 깃발 아래서 열패감을 느끼는 동포들,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 직업을 잃고 휘청거려야 하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아프게 하는 건 내 유품 속에서 네가 보았던 옛날 우리 모습이 담긴 비디오 같은 거 아니겠니. 어린 시절의 소중한 꿈과 웃음과 희망이 담겼던 그곳이 사라진다는 걸 깨닫는 아픔 말이다.

엄마가 그 사회에 그렇게 충성을 바쳤던 것도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그 곳을 그 기억처럼 파라다이스로 만들고 싶었던 소망 때문이었던 것 같거든.

엄마가 침대에서 일어나 통일 독일의 거리로 처음 나가던 날 헬리콥터에 매달린 채 쓰레기장으로 날아가는 레닌 석상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영웅이 버려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었던 것은 한낱 저렇게 하늘에 둥둥 떠있는 돌덩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지금 독일에서는 동독 테마파크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우리의 체제는 지금은 한나절 거리의 놀이동산으로 기억되는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바라고 있단다. 무너진 장벽의 돌덩이를 장식품으로만 간직하는 사람들이나, 폐기 처분된 레닌 석상에 비웃음을 던지는 사람들이나, 혹은 동독이 한낱 복고풍 패션의 로고나 테마파크의 놀잇감이라고만 여기는 젊은이들에게나. 거기에 한때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자신의 모든 꿈과 희망과 열정을 바쳤던 엄마 같은 사람들의 눈물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는 그런 바람 말이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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