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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성병 기록 누출' 연말정산 괴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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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연말정산 간소화를 위해 병.의원 등이 건강보험공단과 국세청에 의료비 관련 자료를 제출하도록 한 데 대해 사생활 침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소득세법을 개정해 의료비 관련 증빙서류를 병.의원이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국세청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 제도가 개인이 본인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개인정보의 자기 결정권)와 병.의원의 영업 자유 등을 제한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의사협회는 4일 국세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낸 데 이어 7일 의료기관의 소득공제 증빙서류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는 소득세법과 시행령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세청은 행정집행을 방해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10일 밝히는 등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의료비 자료 제출과 관련해 최근 인터넷에 '성병.낙태 남들이 알까 걱정된다''가정 파탄 누가 책임지나' 등의 글이 유포되고 있는 데 대한 조치다.

?무엇이 논란인가=지난해 개정된 소득세법은 의료비뿐 아니라 보험료.교육비.직업훈련비.개인연금.연금저축.퇴직연금.신용카드 등 8개 항목의 증빙서류를 해당 기관이 세무 당국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했다. 근로자는 일일이 관련 회사를 찾아 연말정산 자료를 구하는 수고를 덜어준다는 명분이었다. 세무 당국 입장에선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병.의원의 세무 관련 자료를 보다 확실하게 챙길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8개 업종 중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있는 곳은 병.의원뿐이다. 의사협회의 거부 명분은 "환자진료 내역이 건강보험관리공단을 통해 국세청에 집중될 경우 환자의 질병과 치료 내역 등 개인 정보가 유출돼 심각한 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세청은 병.의원이 수입금액 노출을 꺼리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국세청 안승찬 원천세과장은 ▶환자의 병명에 관한 정보는 국세청에 제출되지 않으며 ▶공인인증서를 사용해야만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어서 본인 이외에 제3자의 자료 접근이 불가능하고 ▶해당 내용을 출력할 때는 병원명.병과가 표시되지 않기 때문에 환자 정보가 노출될 우려는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근로자가 출력하는 소득공제 자료엔 환자의 질병 명칭과 진료 과목이 없고 환자가 지급한 금액만 나오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안 과장은 또 "환자가 진료 정보의 국세청 제출을 원하지 않을 경우 해당 병.의원이나 건강보험공단에 자료 제출 거부 의사를 밝혀 스스로 비밀을 보호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자료 제출을 거부한 근로자가 7일 현재 3400명에 이른다고 국세청은 밝혔다.

그러나 근로자가 출력한 자료엔 질병 정보가 없더라도 국세청과 건강보험공단이 질병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세청이 '빅 브러더' 되나=지난해 바뀐 소득세법에 따라 올해부터 8개 항목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가 국세청에 집중된다. 지난해까진 근로자가 소득공제를 위해 제출한 자료만 국세청이 갖게 되지만, 올해부턴 본인 스스로 제출을 거부하지 않으면 ▶신용카드 사용 내역 ▶연금 저축과 보험 가입 상황 ▶의료비 지출 내역 등 상세한 자료가 국세청에 모이게 된다. 국세청은 이미 임금 근로자 1489만 명 중 1074만 명(72%), 자영업자 499만 명 중 436만 명(87%)의 소득 자료를 갖고 있다. 여기에 8개 세부항목까지 추가된 것이다.

이 같은 정보 집중 때문에 국세청이 '빅 브러더'(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서 나오는 용어로 정보를 독점해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을 뜻함)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국세청이 관련자료를 다른 용도에 쓰거나 이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다. 국세청은 이렇게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세통합전산망(TIS)에는 다단계 보호 장치가 있기 때문에 국세청 직원도 본인 업무와 관계 없는 자료를 볼 수 없고, 공식 허가를 얻어 자료를 확인한다고 해도 본인의 접속 기록이 시스템에 남기 때문에 자료가 악용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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