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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란 … "일하는 시간은 줄이고 쉬는 시간 늘리는 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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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인이라고 흔들의자에 앉아 햇볕만 쬐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은퇴 후 심심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앨런 스튜어트(91)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호주 뉴사우스 웨일주의 티가든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스튜어트 할아버지. 그의 첫인상은 '젊다' 였다. 서재에 놓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공로패가 그의 실제 나이를 가늠케 할 뿐이다. 스튜어트 할아버지는 올 여름 호주 뉴잉글랜드대학교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1936년 시드니대학교 치과대를 졸업한 지 70년 만에 받는 두 번째 졸업장이었다. 그의 만학 열정에 호주는 물론이고 독일 언론까지 다녀갔을 정도다. 그는 그러나 학위를 땄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에 이런 일이…'식의 흥밋거리로 비치는 게 싫단다. 대학 졸업은 흔한 일이고, 차이라면 나이가 '조금 더' 들었다는 것뿐이란다.

호주는 이미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의 14%에 달하는 고령사회다. 이 때문인지 호주에는 스튜어트 할아버지와 같은 '별난' 노인이 많다. 66세에 자선기금 모금 마련을 위해 5500km 달리기에 나선 블래스틱 스크바릴 할아버지, 80세에 해머던지기 대회에 출전한 엘리 랍카이 할머니 등…. 노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즐거운 노후의 비결에 대해 그는 "은퇴를 일몰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는 은퇴를 "일하는 시간이 줄고 쉬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시점"으로 정의한다. 그는 65세까지 치과의사로 평생을 보냈다. 사명감도 있었지만 생계 수단으로서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은퇴 후엔 비영리기구(NPO)에서 일하면서 남을 도왔다. 일주일에 2~3번 뉴캐슬에 위치한 병원에 나가 장애인.저소득층 등 민영보험의 혜택을 못 받는 사람들을 치료했다. 그러나 꼬박 4시간을 운전해 병원을 왔다갔다 하는 건 무리였다. 아쉽지만 3년밖에 일을 하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대신 동네 골프클럽 이사회 멤버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수락했다. 클럽에 각종 정책을 제안해 실행에 옮겼다. 골프클럽은 곧 동네 노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가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클럽 로비 한쪽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그러다 55살 먹은 아들이 학위를 따는 것을 보고 '나도 한번…' 하는 마음에 새로운 학위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학비는 정부에서 빌려 줬다.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어려운 법조문은 차치하고 컴퓨터로 과제물을 작성, 제출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독수리 타법으로 한 장짜리 리포트를 쓰는 데 걸린 시간이 반나절. 주말에 아들을 불러다 도움을 받을까도 했지만 생각을 접었다. 노인은 항상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싫어서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포트 작성에 걸리는 시간은 점점 줄었다. 한 학기를 무사히 끝내고 나니 어느새 졸업장까지 받게 됐다. 아예 내친김에 내년에는 저소득층을 위한 법률상담 자원봉사를 해볼 작정이다.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을 찾아. 그러면 추억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만들면서 살게 돼."

특별취재팀=김창규.최준호.고란(이상 경제부문).김영훈(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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