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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4강, 경제협력은 기본 … 군사까지 손잡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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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 논란이 한창이던 8월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주권국가로서의 위상"을 강조했다. 전작권 환수 반대론자들이 제기한 국방력 확보, 경제적 비용 등의 현실적인 문제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발언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주 외교'에 대해서도 틈틈이 언급했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 4강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는 동북아 세력 균형의 중심이 되겠다는 뜻으로 '동북아 균형자론'도 주창했다. 그러나 그 4강들은 말보다는 실리외교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 미국, 중국 견제하면서도 군사교류

"역사는 길고도 길다. 모든 관계는 언제든 좋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11월 베트남 방문 직후)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면서도 심지어 군사 분야에서까지 양국 간 거리를 바짝 좁히고 있다. 미국과 중국 해군은 지난달 19일 사상 처음으로 합동 해상훈련을 했다. 미국에선 태평양함대 소속 상륙수송선 '주노'호와 미사일 구축함 '피츠제럴드'호 등 함정 4척이 투입됐다. 중국에선 남해함대 소속 종합보급선 '둥팅후(洞庭湖)'호와 미사일 구축함 '잔장(湛江)'호가 동원됐다. 양국 군함들은 중국 광둥(廣東)성 동쪽 남중국해 해상에서 5시간 동안 P-3 대잠초계기와 수송기 등의 도움 아래 조난선박 구조훈련을 했다. 5년 전 이 바다 상공에서는 미국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벌어졌고, 이후 양국 관계는 급랭했다. 그런 두 나라가 병력까지 투입해 합동군사 훈련을 하게 된 것은 테러 예방과 해상안전 확보에서 서로 실익이 있다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미군 태평양사령부는 중국과의 군사교류를 강력히 주장했다. 북한의 핵실험 같은 긴급사태가 일어났을 때 오판을 줄이고 협력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결국 미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여 합동 군사훈련이 성사됐다. 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은 "양국의 20여 년 군사교류사상 가장 의미 있는 교류"라고 평가했다.

미 국무부는 지난달 종교탄압 특별관심국 명단에서 베트남을 처음으로 뺐다. 종교탄압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이 더 고려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무부는 외신기자 브리핑에서 "조지 W 부시(얼굴)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엄청나게 중요하다(terribly significant)"고 강조했다.

워싱턴=강찬호 특파원

■ 중국, 북한과 거리 두며 손익 중시 실용외교

"자신이 일어서고자 하면 타인도 일어서게 하고,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면 타인도 달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후진타오 국가주석, 11월 인도 뉴델리 강연에서)

중국과 북한이 더 이상 혈맹관계가 아니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중국 외교의 달라진 모습이다. 북한 문제도 사안별로 판단하고 있다는 얘기다. 후진타오(胡錦濤.얼굴) 주석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현 4세대 지도자들은 모두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다. 이념도 좋지만 손익을 따지는 데 더 능하다. 중국 실용외교의 바탕이다.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은 난사(南沙)군도의 영유권을 놓고도 다투는 사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유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대신 공동개발안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0월 30일 중국 남부 광시(廣西)좡족(壯族)자치구의 수도 난닝(南寧)에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3국 정상이 따로 만나 공동개발에 합의했다. 이 지역에 대한 경비, 해적 퇴치, 밀수범 색출도 공동으로 벌여나가기로 했다. 소규모 상설 연합군을 창설한 셈이다.

후 주석은 취임 첫해인 2003년부터 실리에 몰두했다. 1962년 국경전쟁까지 벌였던 인도를 제일 먼저 끌어들였다. 인도군을 상하이(上海)의 앞바다로 초대했다. 여기서 중국-인도 합동군은 국지전과 대테러전에 대비한 합동훈련을 했다.

후 주석은 지난달 APEC 정상회담에서도 실리외교를 선보였다. 영토분쟁으로 아직 중국에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고 있는 인도 국민들을 의식해 중일전쟁 때 헌신적으로 중국 환자를 돌보다 숨진 인도 의사 코트니스의 가족을 찾았다.

인도 방문 후 두 나라는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석유자원 공동개발을 위해 합작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지나친 경쟁 탓에 시가의 2~3배나 되는 돈을 주고 유전개발권을 사들이는 우를 더 이상 범하지 말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베이징=진세근 특파원

■ 일본, 야스쿠니 접고 중국과 '국익외교'

"일본.중국 공동의 전략적 이익에 기초해 상호 이익을 추구하도록 노력하겠다."
(아베 신조 총리, 11월 중.일 정상회담서)

아베 신조(安倍晋三.얼굴) 총리는 9월 하순 취임 직후 중국을 잇따라 방문했다. 그는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문제로 중국과의 관계를 경색시킨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는 달리 참배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서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도쿄 하네다(羽田) 공항과 상하이 훙차오(虹橋) 공항을 잇는 셔틀 항공편을 설치하는 데 원칙적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르면 내년 봄부터 운항이 시작된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이 노선이 생기게 되면 일본 쪽에 실리가 더 크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일본 기업인들의 이용 횟수가 중국인들에 비해 더 많다는 것이다. 상하이 중심 지역에서 15㎞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훙차오 공항을 이용하게 되면 당일 출장도 가능해진다.

일본 경제산업성의 한 간부는 "중국의 베이징~상하이 간 고속철도로 일본 신칸센이 채택될 가능성이 더욱 커진 게 아니냐"며 "또 그동안 동결돼 온 중국 원자력발전소 건설 프로젝트의 일본 업체 수주도 재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결실은 정치 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방일이 내년 상반기로 잠정 합의된 것을 비롯해 그동안 중단됐던 각종 교류에 물꼬가 트였다. 지난달 29일에는 고위급 군사회담을 열고 내년 중 중국의 차오강촨(曹剛川) 국방부장이 일본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아소 다로 외상은 지난달 30일 "일본 외교에 또 하나의 축을 추가할 것"이라며 "중앙아시아와 동유럽.동남아의 민주적 제도 정착과 경제 발전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요미우리 신문은 "에너지 확보를 통해 국익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외교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 러시아, 가스관 외교로 주변국 '쥐락펴락'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응당 차지해야 할 몫을 얻기 위해 투자.혁신에 집중하겠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5월 연례 국정연설에서)

러시아는 올 초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일시적으로 차단해 러시아 천연가스 소비국들을 경악하게 했다.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는 우크라이나와의 가스가격 협상이 지연되자 가스관을 틀어막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는 50달러에서 95달러로 올리는 선에서 합의를 봤지만 내년엔 다시 130달러로 올리겠다는 입장이다. 역시 반러시아 성향을 보이는 그루지야에 대해서도 내년도 가스가격을 두 배 이상 인상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자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옛 소련권 국가들을 응징하는 도구로 에너지를 이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반면 소련 시대 국경 분쟁 등으로 갈등을 겪었던 중국과는 유례없는 밀월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푸틴(얼굴) 대통령은 올 3월 취임 이후 네 번째로 중국을 방문해 모두 22건의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푸틴은 특히 시베리아 자원 개발에 중국의 참여를 보장하고, 앞으로 5년 내에 중국으로 두 개의 가스관을 건설해 천연가스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러시아 무기의 최대 구매국이자 미국의 일극(一極) 체제 견제를 위한 파트너인 중국에 대한 특별 배려였다.

푸틴 대통령은 7월 중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한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서 중동사태, 국제 에너지 안보 등에 대해 독자적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미국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정책은 피하고 있다.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가 자국에 결코 유리할 수 없다는 실리적 판단 때문이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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