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글로벌아이

맥나마라를 닮아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그는 메모에서 "미군이 이라크에서 하는 일이 충분히 잘되지도 않고, 빠르게 진척되지도 않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며 "큰 조정이 필요한 때"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21가지 선택사항을 제시했다. 거기엔 미군 기지 감축, 미 주력군 후방 배치 등의 방안이 담겼다. "군의 임무와 미국의 목적-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나-을 다시 부여하고 최소화한다"는 대목도 들어 있다. 매력 없는 방안의 맨 위에는 '현재의 진로를 유지하는 것'을 올려놓았다. 이라크전에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기자들에게 "그것은 틀렸다"고 면박을 주면서 훈계조로 정당성을 설명하던 '군사 닭장의 잰 체하는 수컷 우두머리(the rooster in the military henhouse-the alpha male.워싱턴 포스트 11월 9일자)'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메모다.

럼즈펠드가 늦게나마 현실을 직시한 건 잘한 일이다. 그의 새로운 인식은 이라크전을 '럼즈펠드의 눈'으로 관찰해 왔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정책을 수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부시 대통령도 이제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럼즈펠드가 정책의 변화를 건의했다고 해서 그의 잘못이 면책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라크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실패를 시인하는 듯한 비밀 메모를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것과 국민 앞에 진솔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건 다르다.

그가 이라크에서 싸우는 미군의 목적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할 정도로 혼란을 느꼈다면 사정이 왜 그렇게 됐는지, 뭐가 잘못됐는지 국민에게 알리고 지혜를 구했어야 했다. 그걸 생략하고 비밀 메모만 적어 보냈으니 "정직하지 못하며 이기적인 행동"(이라크전에 참가했던 소장 출신 폴 이스턴)이란 지적을 받는 게 아닌가.

럼즈펠드의 메모는 존 F 케네디와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 베트남전을 주도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메모를 연상시킨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에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데도 존슨 대통령이 미군을 더 투입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메모를 백악관에 보냈다.

그리고 건의가 수용되지 않자 바로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맥나마라는 "우리는 지독하게 잘못했다. 우린 미래 세대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며 베트남전의 문제를 낱낱이 밝히는 회고록을 남겼다. 럼즈펠드가 맥나마라에게서 본받아야 할 건 메모가 아니라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용기여야 한다.

한국의 집권세력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대통령과 여당은 서로 "네 탓이오"라고 하면서 결별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 전에 자기가 저지른 일들이 나라에 어떤 상처를 냈는지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맥나마라처럼 잘못을 고백하고 설명해야 한다. "인간은 과오를 회피하는 것보다 과오를 뉘우치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18세기 독일 계몽주의 물리학자 게오르크 리히텐베르크)는 말을 집권세력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개혁세력의 재결집'이니, '통합신당'이니 하는 간판 뜯어고치기 작업은 그 다음의 일이다. 고름이 살이 될 수 없듯 잘못에 대한 진실한 반성 없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집권세력은 깨달아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과 여당의 현실 인식 수준이 적어도 럼즈펠드보다는 상위에 있기를 바란다.

이상일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