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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양들의 침묵' FBI처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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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 소속 범죄 분석 요원들이 4일 ‘상계동 주점 살인사건’의 현장사진을 보며 범죄 행태를 분석해 범인의 윤곽을 파악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윤외출 경정, 오익준 경감, 김경옥 경장, 김윤희 경장, 윤태일 경장, 이승훈 경장.김성룡 기자

#1. 10월 30일 서울 상계동 Y주점. 주인 장모(52.여)씨가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에선 현금 5만원이 든 피해자의 지갑이 사라졌다. 맥주병과 컵의 지문은 지워졌고, 담배꽁초조차 물로 씻겨졌다. 안주로 먹다 남은 포도 껍질과 이쑤시개 몇 개만 남아 있었다.

#2. 11월 16일 충남 천안 성정동의 원룸. 정모(42.여)씨가 전깃줄로 목이 감겨 숨진 채 피살됐다. 외부에서 문을 따고 들어간 흔적이나 지문은 없었다. 정씨의 휴대전화만 사라졌을 뿐이다.

지난달 초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소속 오익준(34.경감) 행동과학팀장은 권일용(42) 경위 등 범죄분석 요원(프로파일러) 7명을 소집했다. 미궁에 빠진 '상계동 주점 살인사건'을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범인의 윤곽을 그리기 위한 '범죄의 재구성'에 착수했다.

프로파일러들은 "현장에서 물증을 발견할 수 없었고, 피해자가 치정.원한 관계가 없어 현장수사 기법으로는 용의자를 압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범인이 40, 50대 중산층 이하의 여성을 노렸고, 꼼꼼하게 증거를 인멸했으며, 범행 목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범죄 유형을 추론했다. 이어 '음주와 금전 문제가 있으며, 저학력 출신으로 강도.살인 전과를 가졌다'는 프로파일링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권 경위 등은 250건이 넘는 전국의 강력범 검거 보고서를 챙겼다. 그러던 11월 25일 충남 천안경찰서가 김모(34.구속)씨와 민모(34.구속)씨를 '천안 원룸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검거했다. 이들은 희생자 정씨의 휴대전화로 성인 채팅을 하다 붙잡혔고 범행을 자백했다.

오 팀장은 천안 원룸 살인사건의 검거 보고서를 주목했다. 보고서는 단 몇 줄에 불과했고 내용도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파일러들은 ▶40대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고▶가스 검침원으로 위장해 피해자에게 쉽게 접근했으며▶목을 졸라 살해한 뒤▶지문과 유전자(DNA) 흔적을 지우는 등 상계동 사건과 유사한 정황을 놓치지 않았다.

행동과학팀은 상계동 사건 현장의 포도 껍질, 이쑤시개에 남은 DNA 분석을 하고, 천안 원룸 사건 범인의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DNA를 대조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두 사건 현장에 남긴 신발 자국도 일치했다.

경찰은 DNA 검사 결과를 제시하며 범행을 추궁한 끝에 4일 범인들로부터 상계동 사건에 대한 자백을 받아냈다. 범인들의 학력.전과 등은 프로파일링과 일치했다.

오 팀장은 "가스 검침원 위장(천안)과 손님 위장(상계) 등 사건의 외형이 다르기 때문에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라며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을 동원했기에 사건 해결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 삼총사의 합작=프로파일링을 경찰이 도입한 데는 '삼총사'의 노력이 컸다. 프로파일러를 총괄하는 윤외출(42.경정) 서울청 과학수사계장은 2000년 2월 화성 연쇄 살인사건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에 행동과학팀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현장감식 요원으로 잔뼈가 굵은 권일용 경위는 윤 경정과 함께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을 개척했으며, 올해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익준 경감은 지난해 행동과학팀장으로 합류해 7명의 프로파일러를 지휘하고 있다.

경찰은 올해 살인.강도.방화 등 강력범죄 중 연쇄 범죄 등 이상 징후가 있는 사건을 골라 컴퓨터 데이터베이스 자료를 축적, 프로파일링 수사에 활용하고 있다. 현재 전국 경찰청에 46명의 프로파일러가 활약 중이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 프로파일링(profiling.범죄분석)=범행 현장에 남은 흔적을 바탕으로 범인의 성격·직업·취향 등을 추론하는 수사 기법. 심리·행동양태 분석 등 다양한 기법이 동원된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존 더글러스가 1978년 처음 범죄 수사에 도입했다. 더글러스는 영화 '양들의 침묵'(사진)에서 스털링(조디 포스터)요원 상사(스콧 글렌)의 실제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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