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짱이를 전사로 키우는 우/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문화와 기업」이라는 주제로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전문가들이 모여 진지한 토론회를 지난해 12월초에 가진 바 있다.
연일 계속되는 토론회에 지쳐있는 참석자들에게 때아닌 청량제로서,특히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감명을 준 인물이 나타났다.
한국 문화정책의 최고 담당자인 이어령장관의 짧은 연설은 풍피두예술센터 회장인 앨런 아르베일레를 비롯한 프랑스 예술계 거물들에게 정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고 참석했던 국내 인사들이 전하고 있다.
신선한 충격을 준 이장관 연설내용은 이러했다. 이솝우화속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다시 거론하기엔 너무나 진부하다.
그러나 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해 돈을 모은 기업과 기업인,베짱이처럼 빈둥대며 밤낮으로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문화예술인이 이젠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추운 겨울밤,먹을 것이 없어 개미집을 찾아간 베짱이를 문전박대해서 쫓아낼 일이 아니라 따뜻이 그를 맞이해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것이 기업이 문화를 맞이하는 자세여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베짱이 문화예술인의 활동이 필요하고 중시되는 때다.
참으로 쉽고도 효과적으로 이장관은 문화와 기업가의 상관관계를 설명했고 그 방향까지 제시하는 비유와 레토릭을 구사했다.
참석자들은 이 기발한 연설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비록 1년밖에 되지 않은 문화부였지만 문화부장관이 이처럼 번득이는 감각과 문화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문화의 일상화와 문화공간의 확대,그리고 문화예술인의 육성을 위해 고전분투하고 있고 드물게도 프랑스 문화예술인들 앞에서 앙드레 말로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을만큼 우리의 문화정책 책임자의 역량은 뛰어나다.
뿐만 아니다. 웅대한 석조건물과 최고의 시설을 갖춘 예술의 전당이 있고 현대미술관이 있으며 총독부 자리를 헐어 또다른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보일만큼 우리의 문화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번듯하고 그럴싸하다.
문화부장관의 기발하고 신선한 연설이 진행되며 만장의 박수를 받고 있을 무렵,그 웅대한 석조건물인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는 『젊은시각­내일에의 제안전』이 열리고 있었다.
초대관장으로 임명된 윤범모씨가 30대 평론가 5명에게 각각 10명씩의 작가를 추천받아 개막된 전시회였다. 제목대로 젊은 화가들의 새로운 시각을 한자리에 모은 기획전이었다.
젊은 평론가가 추천하고 젊은 예술가들이 제작한 작품인만큼 그 속에는 반체제적 소재를 다루거나 광주민주화항쟁을 묘사한 『깃발』같은 작품도 있게 마련이었다.
이런 기획전이 예술의 전당에서 열릴만큼 세상도 바뀌었고 정부의 문화정책도 권위주의시대와는 다른 관용을 보이고 있다해서 뜻밖의 호평을 받은 기획전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태는 정작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전시회 작품들이 KBS­TV를 통해 방영되고 이를 국회의사당 휴게실에서 우연히 본 몇몇 국회의원들이 어째서 저런 작품이 예술의 전당에 번듯이 걸릴 수 있느냐고 질타하면서부터 청와대가 불호령을 내리고 예술의 전당 책임자는 문화부 고위간부들 앞에서 불호령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전시장 문을 닫아라,미술관장을 쫓아내라」는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급기야 미술관장은 이런 문화풍토 속에서는 관장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항의성 사표를 던졌고 참가했던 화가들과 민중미술계 단체들은 정부의 예술표현에 대한 명백한 탄압이라고 규탄했으며 예술의 전당 노조단체가 여기에 합세하기까지 이르렀다.
최고의 문화장관과 최상의 문화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우리의 실제 문화예술 창작현장이 아직도 유신식·5공식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의 시를 빌미삼아 10년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시인이 있었는가 하면 까닭모를 이유로 수많은 문화예술가들이 사찰의 대상이 되고 투옥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6공에 들어서 적어도 문화 예술계 분야는 전 시대와는 다른 민주화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도를 넘어선 대통령의 희화화나 미술작품속의 정치성이 강렬하게 투영되기도 했고 남발되기까지도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치열성과 남발이 가라앉는 추세의 지금에 와서 별달리 문제가 될 수 없는 작품을 가지고 문화부나 한국문화예술계가 발칵 뒤집힐 일로 비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베짱이는 베짱이대로의 세계가 있고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문화예술에는 중심과 주변의 논리가 정연하게 존재한다. 주변문화의 전위성이 끊임없이 생성하고 도전하면서 중심문화의 보수성과 충돌하고 교감하게 된다. 이 충돌과 교감속에서 문화는 스스로 제길을 열고 숨쉬며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다.
베짱이는 베짱이답게 놀게 내버려두면 될 일이다. 어쭙잖게 이들을 건드리고 자극하는 바람에 어느날 베짱이는 전사가 되고 투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유신식·5공식 문화정책의 결과였다.
세월이 바뀐만큼 이젠 다시 그런 망령이 나타나서는 안될때인데도 어째서 미술작품 하나에 청와대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기관원의 전시장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미술관장의 목이 날아갈 수 있는가.
베짱이를 전사로 키우는 전날의 우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도 베짱이를 베짱이답게 내버려둘줄 아는 문화적 관용이 필요하다. 그것이 문화예술인을 위한 것이고 별다른 육성책을 바라지 않는 베짱이 나름대로의 소원임을 기억해둬야 할 것이다.<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