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의 진상(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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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의 키예프근처에 바비이 야르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다. 한때 이 공원은 이름만 공원이지 조각이나 기념비같은 것 하나없는 초라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이 바비이 야르공원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소련의 저항시인이었으며 3년전엔 우리나라에도 다녀간 예프투셴코의 『바비이 야르』라는 시 때문이다.
『바비이 야르 위에는 기념비도 없다/초라한 비석처럼 깎아지른 절벽만이 있을 뿐/나는 두렵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나는 이곳에 매장된/수천의,수천의 시체 위로 울려퍼지는/한마디의 거대한 소리 없는 비명이다/나는 이곳에서 학살된 모든 어린애다/나는 절대로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로 끝을 맺고 있다.
예프투셴코가 절대로 잊지못하는 바비이 야르는 41년 나치가 3만4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큰 웅덩이 하나에 시체를 묻은 곳이다.
소련 정부는 뒤에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을 달래는 묘비명하나 세우지 않았다. 그들도 반유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비이 야르의 비극못지 않은 KAL기사건의 진상이 뒤늦게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소련의 이즈베스티야지는 작년 12월20일자에 지난 83년 사할린 근해에서 소련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된 KAL기의 잔해와 2백69명의 탑승자 전원의 시체를 이미 발견하고도 소련 당국이 그동안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즈베스티야는 또한 KAL기의 잔해가 수심 30여m의 바다밑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같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시체를 모두 화장했다는 사실까지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는 소련 당국이 KAL기사건에 대한 추적을 중단하고 시체를 화장한 사실을 보도하지 말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폭로했다.
아직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언급이 없는 터라 사실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같은 구체적 사실과 정황으로 미루어 이즈베스티야의 보도는 KAL기사건의 진상을 어느정도 전해주고 있음이 틀림없다.
소련 당국은 하루속히 진상을 공개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KAL기사건을 바비이 야르에서처럼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두려해서는 또다시 역사에 큰 오점을 찍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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