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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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호 30면


이문재

시계에 밥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손목시계는 하루에 한 번
괘종시계는 한 달에 한 번

하루 한 끼 배불리 먹기 힘든 시절
하루에 한 번 손목시계에 밥을 줬다.
월급을 받지 않으면 식구들 굶던 시절
한 달에 한 번 괘종시계에 밥을 줬다.

밥 주는 시계가 사라지면서
시계는 오래갔지만
자동으로 오래가고 정확해졌지만
시계는 죽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완전히 죽고 나서야
건전지를 먹을 수 있었다.

시계가 밥을 먹지 않게 되면서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진짜로 건전지가 떨어진 사람들
건전지가 떨어져도 구할 수 없는 사람들
누가 건전지를 갈아끼워줘도
살아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시계에 밥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래도 못 미더워 시계가 가는지
귀에다 갖다대고 째깍째깍 소리 들어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괘종시계 바늘이 9시 근처에서
못 올라가는 기색이 보일라치면
식구 중에 먼저 본 사람 얼른 일어나
까치발을 하고 태엽 끝까지 감아주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

태엽을 감아 작동시키는 오토바이 장난감이 있었습니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았고 벽에 부딪혀도 금세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태엽이 모두 풀리면 멈춤과 동시에 쓰러졌습니다. 한번은 평소보다 힘껏 태엽을 감아본 적이 있습니다. 더 빨리 그리고 오래 달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한계와 끝이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어느 정도가 지나면 쉽게 감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 무리해서 힘을 주면 장난감은 영영 쓸모가 없어질 게 분명했습니다. 마치 그때의 장난감처럼 나의 삶이 매번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누가 나의 태엽을 감아줄 수 있을까요.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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