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열무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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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호 30면

열무꽃
윤중호

너무 게으르거나 혹은 지나치게 바빠서
주말 텃밭 구석구석 열무 씨를 뿌려놓고
전혀 왕래가 없는 텃밭마다
봄 가뭄에 바짝 비틀어진,
채 한 뼘도 자라지 못한 열무가, 어느 날 갑자기
쑤욱- 대궁을 밀어 올리더니
연보랏빛 열무꽃이 분분하다.
나풀나풀, 바람이 불면 일제히
어린 나비로 고운 날갯짓하는
연보랏빛 꽃무리들.
너무 게으르거나 혹은 지나치게 바쁜
텃밭 주인들이 본의 아니게 풀어논
난데없는 꽃잔치.
주인들은 꽃구경도 안 오는데
농사꾼 할아버지는 끌끌 혀 차고
건달 농사꾼만 새벽마다 환히 피네.『고향 길』 (문학과지성사 2005)

어머니는 꽃과 식물을 좋아하지만 좀처럼 꽃구경을 가는 법이 없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진해나 구례쯤으로 여행을 다녀오자고 권해도 싫다고만 합니다. 아니 세상 쓸데없는 일이라 깎아내립니다. 어머니의 꽃구경 무용 논리는 이렇습니다. 집 앞 길가에 벚나무 몇 그루 있고 앞산에 진달래 개나리 피고 작은 텃밭에 오이꽃도 작약도 해당화도 백일홍도 국화도 순리대로 열릴 텐데 왜 그 멀리까지 꽃을 보러 가느냐는 것입니다. 돈 만 원을 십만 원 혹은 백만 원쯤이라 크게 여기고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는 이제 풍경과 시선까지 절약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 듯합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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