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의 왕자' 김기민 "너무 바쁘고 힘들어 매너리즘이 안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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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최초', '최고'의 역사를 쓰고 있는 발레 무용수 김기민(32)이 '발레슈프림 2024'로 한국을 찾는다.
김기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이던 17살에 이례적으로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지그프리드 왕자 역을 맡았고(2009), 그 후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을 초연한 클래식 발레의 종가, 러시아 마린스키발레에 입단(2011)해 동양인 최초로 '수석' 타이틀을 거머쥔(2015) 세계 최정상급 무용수다. 24살에는 '무용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상(2016)을 받았고, 27살에는 마린스키극장에서 단독 공연(2019)을 올렸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인 발레리노 김기민. 사진 김기민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인 발레리노 김기민. 사진 김기민

이번 공연(16~1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는 김기민을 비롯해 프랑스 파리오페라발레 에투알(최고 등급 무용수) 루드밀라 파글리에로,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 수석 프리드만 포겔 등 정상급 무용수 8명이 '오네긴', '돈키호테', '카르멘' 같은 유명 발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선보인다. 김기민은 같은 발레단 동료 레나타 샤키로바와 함께 '미국 발레의 아버지' 조지 발란신이 안무한 '차이코프스키 파드되(2인무)'를 춘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김기민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에서 차이코프스키 파드되를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다. 2018년 미국 뉴욕 발란신 페스티벌에 초청받았을 때 이 작품을 선보였다. 발란신의 본고장 뉴욕에서 발란신의 작품을 춰 달라고 부탁해온 것이다. 그래서 자부심이 있다. 그때 이 작품을 공연하면서 한국에서도 올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기술은 표현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연기에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줄거리가 없는 발란신의 작품은 어떻게 표현하나.
연기가 필요한 발레와 음악성이 필요한 발레가 있다. 차이코프스키 파드되는 후자다. 음악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움직임이 중요하다. 어떤 캐릭터, 어떤 상황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표현의 폭이 굉장히 넓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듣고 원하는 대로 표현하면 된다. 100명의 무용수가 차이코프스키 파드되를 춘다면 100가지의 버전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기민이 발레 '돈키호테'에서 남자 주인공 바질을 연기 중이다. 사진 김기민

김기민이 발레 '돈키호테'에서 남자 주인공 바질을 연기 중이다. 사진 김기민

또 다른 작품으로 '돈키호테 그랑 파드되'를 선택했다.
처음 선보이는 작품(차이코프스키 파드되)이 있으니 나머지 하나는 대중적인 작품을 골랐다. 발레 돈키호테는 한 마디로 쉽고, 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발레슈프림' 공연 1막은 발레 클래스로 진행된다. 어떻게 이런 기획이 나왔나.
백스테이지도 공연의 연장이고 예술이다. 연습실에서 동료 무용수들의 춤을 보면서 감동하는 경우도 많다. '이걸 무대 위로 올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기획했다. 1막이 시작되면 플리에, 탄듀, 제떼 같은 발레의 기초 동작부터 시작해 센터 워크까지 클래스와 똑같이 진행한다. 
마린스키의 수석이 된 지 벌써 10년 차다. 
10년이나 됐다니 실감이 안 난다. 공연을 정말 많이 했고 시간을 꽉 채워 쓴 것 같다. 마린스키 극장은 연간 거의 쉬지 않고 공연을 올리기 때문에 일정이 빡빡하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공연을 자주 올렸다. 해외 원정 공연을 하면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때도 있다.
슬럼프는 없었나.
2016년 부상을 당해 1년 쉬었지만, 그 시기가 슬럼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수석이 되기 전까지는 발레를 정말 열심히 했다. 수석이 된 이후에는 발레 외의 것들에도 시간을 쓴다. 음악도 많이 듣고 책도 더 많이 읽으려고 한다. 더 깊게 느껴야 표현력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가볍고 높은 점프가 그의 주특기다. 사진 김기민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가볍고 높은 점프가 그의 주특기다. 사진 김기민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늘 힘들고 지금도 힘들다. 가장 힘들었던 건 승급한 직후, 상을 받은 직후다. 뭔가를 해냈을 때 항상 더 힘들어졌다. 부담되고 스트레스도 받는다. 다만 어려운 걸 즐기려고 한다. 어려워야 재밌으니까. (웃음)
20대에 두 번이나 마린스키 극장에서 단독 리사이틀 공연을 올렸다. 어떤 의미인가.
김기민 단독 리사이틀 공연이 열리는 날은 말 그대로 '김기민의 날'이다. 캐스팅과 레퍼토리를 무용수가 직접 정한다. 오케스트라와 극장, 동료 단원들도 그날 만큼은 나를 위해 존재한다. 수석 무용수라도 모두가 리사이틀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무용수 1인을 위한 무대인 만큼 티켓 파워를 보고, 얼마나 팬 층이 탄탄한 지를 본다. 
'커리어 하이'의 순간으로 느껴졌나.
무척 감격스러웠다. 내게 '커리어'의 의미는 승급이나 수상이 아니다. 어떤 상을 받았는지, 몇 살에 수석을 달았는지도 중요하지만 단독 공연을 올릴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하다. 그만큼 팬이 많은 무용수라는 의미니까.  
불혹의 김기민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20대를 돌아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30대를 보낸 현역 무용수이길 바란다. 사람들은 젊어지고 싶다,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빨리 늙고 싶다. 40살이 되면 어떤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움직임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동료 무용수와 리허설 중인 김기민. 그는 "수석이 되기 전까지 발레 연습에만 몰입했다면 수석 승급 이후에는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발레 외 다른 예술을 접하는 시간을 늘렸다"고 했다. 사진 김기민

동료 무용수와 리허설 중인 김기민. 그는 "수석이 되기 전까지 발레 연습에만 몰입했다면 수석 승급 이후에는 표현력을 키우기 위해 발레 외 다른 예술을 접하는 시간을 늘렸다"고 했다. 사진 김기민

그때도 마린스키에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아직 마린스키에서 해보지 못한 작품이 꽤 있다. 워낙 레퍼토리가 많기 때문에 수석이라고 해도 모든 작품을 하는 게 아니다. '카르멘'이나 '레이디와 훌리건' 같은 작품도 해보고 싶다. 마린스키에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공연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늘 배워야 한다.
한 주에 여러 공연을 올릴 때도 있더라. 그때그때 다른 캐릭터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한국 발레단처럼 '지젤'을 개막하면 한동안 '지젤'만 공연하는 구조가 아니다. 매일 밤낮으로 다른 공연이 돌아간다. 2주 동안 6개의 전막 작품을 소화한 적도 있다. 캐릭터 적응도 빨라야 하고 연습도 미리 다 돼 있어야 한다. '백조의 호수' 지그프리드 왕자의 춤을 추다가도, 선생님 사인 한 번에 바로 '돈키호테' 바질을 할 수 있게 연습해둬야 한다. 힘들어서 매너리즘이 안 온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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