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보험금 뱉어내" 무리한 소송 늘었나…보험사 패소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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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금을 과다하게 청구했다는 이유로 계약자를 상대로 소송을 건 보험사가 법원에서 패소하는 일이 늘고 있다. 보험소비자 사이에선 “정당한 치료인데도 보험사가 무리하게 소송을 거는 경우가 잦다”는 불만이 나온다.

10년간 병원 생활하는 병인데…보험사 “보험금 뱉어내라”

14일 법조계‧보험업계에 따르면, A손해보험사는 계약자를 상대로 “입원일수가 과다하다”며 보험금을 돌려달라는 소송(구상금 청구)을 낸 뒤 지난해 패소했다. 계약자 김모(56)씨는 2005년 당시 아내를 피보험자로 해 질병‧건강보험에 가입했는데, 아내는 2010년부터 베체트병(전신 혈관에 염증이 발생하는 질환)·고지혈증·경추통·관절통·추간판탈출증 등으로 투병했다. 1년에 200일 이상을 입원하는 생활이 10년간 이어졌고, 보험사로부터 입원의료비와 통원의료비 등 5억9600만원을 지급받았다.

지난 2020년 보험사는 김씨에게 “입원일수가 과다하다”며 2900만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다. 보험사가 받은 의료자문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입원한 1480일 중 141일은 불필요한 입원이라는 취지였다. 1심 재판부는 보험사 주장을 일부 받아들였지만, 지난해 2심 재판부는 김씨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김씨 아내의 입원 기간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김씨 아내의 질병 특성상 증상‧정도가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만큼, 보험사가 받은 자문보단 주치의의 판단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험을 이용한 도덕적 위험 등의 폐단을 억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보험이 본래 기능에 충실할 수 있도록 보험수익자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도 적지 않다”고 언급했다. 보험사가 상고하지 않아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후 보험사는 김씨에게 558만원의 소송비용을 물어줘야 했지만, 수개월 넘도록 지급을 미뤘다. 민사소송법상 변호사비 등 소송비용은 원칙적으로 패소자가 부담한다. 김씨는 “맨 처음 보험사가 요구한 금액은 3억이 넘었다 보니 충격을 크게 받아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며 “소송을 당하지 않았다면 쓸 필요가 없는 소송비용마저 받지 못하는 상황이 억울했다”고 말했다. 해당 보험사는 “입원일수가 이례적으로 길다보니 소송을 제기하게 된 사건”이라며 “소송비용 문제는 뒤늦게 인지해 최근 지급을 완료했다”고 설명했다.

‘무리한 소송’ 늘었나…보험사 전부패소율 증가세

김씨 사례처럼 보험사가 계약자를 상대로 소송을 건 뒤 법원에서 ‘전부패소(법원이 원고 주장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은 사건)’한 경우는 최근 들어 증가세다.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에 대해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판단해 소송을 제기하는 경향이 커진 셈이다.

손해보험협회 공시에 따르면 5대 손보사(삼성화재·현대해상·KB손보·DB손보·메리츠화재)가 원고인 사건의 전부패소율은 지난해 하반기 12%로, 상반기(10.7%)와 2022년 하반기(5.1%)를 거치며 증가했다. 채무부존재확인·부당이득반환청구·보험계약 무효확인 및 부당이득반환청구·손해배상청구 등 소송에서 해당 기간 확정된 판결 중 전부패소한 사건을 집계한 수치다(보험사기 관련 민사 사건은 제외).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최근 실손보험을 비롯해 손해율이 점점 높아지면서 보험사가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커진 측면이 있다”면서도 “보험사별로 소송관리위원회를 마련해 소송 전 사전 심의 절차가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한 손보사가 유방암으로 방사선 온열치료를 받은 계약자에게 “유방암 진료권고안에 해당하지 않고, 입원할 필요도 없었다”며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법무법인 원곡 최정규 변호사는 “최근에는 보험사가 경찰서에 보험사기로 일단 진정을 내고 계약자는 추후 무혐의로 입증되는 경우도 잦다”며 “무리한 소송에 대한 감독과 내부통제가 더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험사기는 가려내야 하는데"…보험사도 고민

다만 보험사 입장에선 정당한 보험금 청구와 사기성 청구를 구분하는 게 쉽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허위·과다입원이나 진료기록 조작 등 보험사기가 늘고 있다 보니 경계할 수밖에 없다"며 "보험금 누수가 생기면 선량한 가입자들의 보험료가 할증되는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정당한 보험금 청구 권리는 보호하되, 사기 피해는 사전에 체계적으로 방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보험사에선 계약자와의 불필요한 법적 다툼으로 번지지 않도록 설계와 판매 과정에서부터 주의를 기울여 예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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