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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 시험대 오른 多者안보 구상

중앙일보

입력

북한 핵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 수개월 간 나타난 가시적인 진전들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첫째 진전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국가들로 구성된 다자협상 테이블이 마련됐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은 핵개발 계획에 강경 대응을 벼르고 있는 5개 나라와 대치하고 있다. 이들이 모인 회담 테이블은 매우 중요한 역내 안보체제의 기틀이 되고 있다.

둘째 진전은 회담 테이블에서 중국의 중재자 역할이 크게 부각됐다는 점이다. 중국의 태도에는 숨은 계산이 깔려 있을 수 있다. 미국이 대북 강경노선 기조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외교적 해법도 없는 상황에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미국의 일방적 영향력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6자회담을 소집했고 넘어선 안될 한계, 즉 '레드 라인'을 북한에 제시했다. 중국은 북한 국경지대에 정규군 병력을 대거 배치시키는가 하면 대북 원유공급을 일시 중단하는 등 북한에 외교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6자회담을 성사시켰다.

여기에 미국.일본.호주 등 국제사회는 북한의 미사일 부품 수출과 마약 밀수.위조달러 공급에 제동을 거는 등 경제제재 강화를 통한 전방위 압박카드를 구사했다. 일본 정부는 6자회담을 앞두고 안전기준 위반을 이유로 북한의 만경봉호 입출항을 금지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그나마 꾸준히 지속돼온 일본으로부터의 돈줄도 서서히 조여들고 있다.

그간 북핵과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 재배치 등으로 갈등을 빚었던 한.미관계는 한국 정부가 이라크 파병과 이라크 재건사업 지원을 발표한 데 이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 제공' 입장을 재확인함으로써 급격히 개선됐다.

다자안보 구상은 이제 구체화하고 있다. 북한이 요구해온 북.미 불가침조약은 애당초 미국이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과의 협의없이 미국이 문제를 혼자 결정할 수도 없다.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뒤 북한이 "주한미군의 존재가 이 조약의 정신에 위배된다"며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를 요구하고 나선다면 어쩔 것인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로는 북핵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할 전망이 그다지 밝은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는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북한의 경제상황은 악화하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경제난과 식량난 등으로 압박을 받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핵개발 카드를 흔들면서 국제사회와 흥정을 하려할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환경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파견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희생자가 속출하면서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중재해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분쟁이 악화일로에 있다. 북한이 오늘날과 같은 시간끌기식 외교를 구사하게 된 배경에는 이라크와 중동평화문제 등 다른 요인들 때문에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외교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깔려 있을 것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미 선거전이 시작된 미국 내 정치상황도 부시 대통령에겐 적지 않은 부담이다.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 행정부는 북한 정권을 믿지 않는다. 역으로 북한도 마찬가지다. 부시 행정부는 지금까지 북한이 완강하게 거부해온 강제 핵사찰 수용과 같은 구체적인 조건 없이는 북한과 어떤 협정도 체결하지 않을 것이다. 오랜 기간 북한의 사기행각을 지켜본 미국은 북한이 순순히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작업을 포기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리라고는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봐야 한다.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미 국무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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