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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4월 수상작] 가슴으로 풀어낸 실타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실뜨기
백재순

중앙 시조 백일장

중앙 시조 백일장

목면사 올을 따라 마음이 자랍니다
손가락 옹알이에 볼 우물 삽을 뜨면
말꽃향 밀물이 되어 턱 밑으로 일렁이고

은쟁반 보석 별님 모양 이어 가듯이
얽히고 막혔어도 가슴으로 풀어내면
실낱은 어둠을 뚫고 연이 되어 흐릅니다

실타래 울을 돌아 손끝에 담긴 내일,
날갯짓 퍼덕이며 달을 밀고 별을 쪼아
오색실 뭉쳐진 꿈을 해 아래에 펼칩니다

◆백재순

백재순

백재순

강원도 강릉 출생. 육군 중령(합동참모본부 근무). 2024년 한국문인 시 부문 신인문학상 수상. 2023년 제38회 전국 한밭시조백일장 입상. 2018년 YTN 남산문학대회 수필 부문 우수상 수상.

차상

그늘의 생존법
조현미

그늘이 깊을수록
담벼락은 자랐다

햇살은 늘 비켜가고
그림자마저 떠나

웃자란 가지 몇 개를 생으로 잘라냈다

당신과 나 사이
맨 처음 틈이 벌고
손잡고 어깨 겯던
배경이 사라지고

오늘은 바람 한 줄기 그 틈에 다녀갔다

손 내밀면 닿을 듯
간격이 참 좋았다

잘린 마디 끝에서
파르라니 피가 돌고

더불어 걸어가야 할 길이 문득, 보였다

차하

내 경로를 탐색합니다
오가을

처음 본 풍경에 생각이 멈추었다
분명히 아는 길인데 낯설은 목적지
발끝을 놓쳐버린 후 목소리가 다급하다

네 자리로 돌아가라 반짝이는 화면 속
유턴이 반복될 때마다 깨어나는 내리막길
방향을 돌려볼수록 걸음만 망설인다

밤의 거울 잃어버리고 꿈만 꾸는 인턴 경력
바라보는 눈길과 가야 할 곳 달라서
자꾸만 되물어보는 내 모습 내비게이션

이달의 심사평

초록의 물결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4월, 이번 응모작들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심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점점 중앙시조백일장에 거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자어나 추상적인 시어들이 많고 일상적인 진술에만 머문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이번 달 장원으로 백재순의 ‘실뜨기’를 올린다. 실뜨기는 실의 두 끝을 묶어서 손가락에 얼기설기 얽은 뒤 둘이 마주 앉아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가는 놀이다. 그 놀이를 통해 마음의 번민들을 풀어내는 과정을 잘 형상화 했다. 묘사가 신선하고 섬세하며 시상의 전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볼 우물 삽을 뜨면”, “실낱은 어둠을 뚫고 연이 되어 흐른”다거나 “날갯짓 퍼덕이며 달을 밀고 별을 쪼아”라는 시인의 심상이 한 폭의 그림에 담겨져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걸어본다.

차상에는 조현미의 ‘그늘의 생존법’을 선했다. 이 작품은 그늘의 역설로 읽힌다. 잘라내고 싶었던 그늘에서 오히려 참 좋은 간격을 발견하고 “웃자란 가지 몇 개를 생으로 잘라”냄으로서 더 이상 불화하지 않겠다는, 자신에 대한 각오를 새기는 작품으로 ‘그늘’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낸 조현미의 사유가 돋보였다. 보내온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좋았다. 좀 더 표현의 묘미를 살려내는 노력을 기대해 본다.

차하는 오가을의 ‘내 경로를 탐색합니다’를 선했다. 일상에서 시를 포착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니다. 운전하면서 바로 가야 할 길을 놓쳐버리고 유턴하는 일을 우리는 흔히 겪는다. 그런 흔한 일상을 “바라보는 눈길과 가야 할 곳”이 다른 청년들의 고민으로 치환하는 능력이 돋보인 작품이다. 비록 몇 번을 ‘유턴’하더라도 바른 길을 가야만 하는 청년들의 고뇌가 잘 읽혀진다.

심사위원 손영희(대표집필), 이태순

초대시조

내 안의 하피첩
김화정

햇차가 그리운 날 여유당에 들어선다
뜰의 매화 피지 않은 골 패인 마루 끝
햇살이 불을 지피며 자리를 권한다

뒤꼍에 참솔나무 그의 서책 펼치는데
입을 연 활자들 새떼처럼 날아간다
끝없이 잡으려 해도 닿을 수 없는 그곳

노을 진 내 치마에 핏빛 시를 쓰리라
발부리 촛불 들고 더듬어간 나의 초당
흙벽에 닳은 촉수로 실금 긋는 매화가지

◆김화정

김화정

김화정

1957년 전남 화순 출생. 2008년 『시와 상상』 신인상 당선. 2010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맨드라미 꽃눈』 『물에서 크는 나무』, 시조집 『그 말 이후』.

아직 봄이 닿지 않은 바람 끝 찬 날에 시인은 여유당을 찾았나 보다. 여유당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의 생가를 이른다. 시의 제목에 나오는 ‘하피첩’은 노을빛 치마로 만든 소책자이다.

1810년 순조 때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마재에 남았던 아내 홍씨는 시집 올 때 입었던 바래고 해진 치마를 그리운 마음 담아 멀리 있는 남편에게 보냈다. “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천리 먼 길 애틋한 마음 부쳤네. 오랜 세월에 붉은 빛 이미 바래니, 늘그막에 서글픈 생각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 자식들 일깨우는 글귀를 써보았네. 부디 어버이 마음 잘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 깊이 새겨 두기를”

다산은 이 치마를 잘라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선비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남에게 베푸는 삶의 가치, 삶을 넉넉하게 하고 가난을 구제하는 방법 등을 전하는 작은 서첩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보물 제1683-2호 ‘하피첩(霞帔帖)’이다. 하피첩은 2005년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돼 지난 2006년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며 세간에 알려졌다.

‘부지런함(勤)과 검소함(儉)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 나은 것이니 한 평생을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라고 어머니의 치마에 사랑을 담아 쓴 글씨, 세상에서 이보다 더 값진 보물이 있을까? 정약용의 위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노을빛 치마에 얽힌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200년의 세월을 넘어 여전히 우리들 가슴을 잔잔히 적신다.

정혜숙 시조시인

◆응모안내

다음달 응모작은 5월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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