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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그늘에 가려 빠듯한 운신 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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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노재봉 청와대비서실장의 총리취임으로 국무총리의 역할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대통령중심제 아래의 국무총리란 그 역할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때는 특정사안의 처리를 위해 총리를 1회용으로 소진하기도 하고 이따금 제한적이나마 총리에게 정치적 역할을 맡기는 경우도 있었다. 헌법상 국무총리는 행정부의 제2인자로서 대통령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괄하게 돼 있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국무총리직을 만든 것 자체가 건국초기 정파간 이해관계 때문에 기형적으로 생긴데다, 최고통치권자가 늘 총리를 철저히 장악해「방탄총리」「돌격총리」「경제총리」「대독총리」등의 별명이 따라다녔다. 6공 들어 노태우 대통령이 비교적 총리에게 권한을 위임한 편이지만 아직도 총리가 명실상부한 행정부의 2인자란 인식을 심어주지는 못하고 있다.
건국이래 강영훈 국무총리까지 42년 동안 국무총리는 국회의 임명동의를 받지 않았거나 못한「서리」를 포함해 연28명이었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4개월이 채 안됐으며 1공화국의 54년11월부터 60년4월까지는 아예 국무총리가 없고 대신 부통령이 있었다.
이중 두 번 재임한 사람은 2대 총리와 2공화국 총리를 역임한 장면씨, 부산피난시절 서리, 4·19직후 과도정부의 수반(6대)을 지낸 허정씨, 자유당정권(4대)과 공화당정권(10대)에서 총리를 역임한 백두진씨 등 3명.
최 장수 총리는 9대 정일권씨(6년7개월)이며 그 다음으로 11대 김종필씨(4년6개월), 12대 최규하씨(4년)이었다.
최 단명 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받지 못하고 11일만에 서리로 물러난 이윤영씨며, 그 다음이 이한기씨(48일) ,장도영씨(2개월), 허정씨(4개월), 장택상씨(4개월), 박충훈씨(4개월)순서다.

<이대통령 철저 이용>
이승만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가장 철저히 이용했다.
국회가 내각제를 전체로 만들어놓은 총리직이 제대로 가동될 경우 대통령의 권한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이 대통령은 한민당의 실력자 김성수씨 대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이범석씨를 초대총리에 지명했다. 그러나 이 총리가 자신의 조직인 족청을 통해 활동을 강화하자 이승만대통령은 6·25직전 해임하고 만다.
이범석씨는 자유당내 반란분위기를 타고 원외자유당을 결성, 이 대통령의 위상을 높여 재기하려고 했으나 족청과 함께「숙청」을 당하고 만다.
그 뒤를 이은 신성모씨는 전시내각을 제대로 이끌지도 못하고 허둥대다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은 서리로 7개월만에 물러났다.
국회가 이승만대통령이 지명한 인물의 임명동의를 거듭 거부하자 이 대통령은 미국 측이 지원한 장면씨를 2대 총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장면은 역시 미국의 하수인」이라고 비난, 사이가 좋지 않았다. 2대 대통령후보 모의 투표사건과 관련, 이 대통령이 장 총리의 비서에 대해 검거령을 내리자 장 총리는 외국병원 선으로 피신하는 소동을 벌이다 끝내 사임하고 말았다.
장 총리 후임으로 지명한 허정·이윤영씨를 국회가 잇따라 비토하자 이 대통령은 장택상씨를 지명, 가까스로 국회동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인사·재정·외교·군사 등은 대통령의 권한이며 총리는 보좌기관이라는 각서를 받고 장택상 총리를 취임시켰다.
장택상 총리는 정부의 대통령직선 양원제안과 국회의 내각제안을 발췌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관권선거로 이 대통령을 재선시켜「정치총리」란 이름을 처음으로 얻었으나 결국 후루이치 사건으로 사표를 내야했다. 후루이치 사건은 전시물자 수송을 하는 일본인업자가 장 총리를 만났는데 이 자가 국제간첩이라는 주장이었다.
경제 통인 4대 백두진 총리는「예절이 바르다」는 점과 전시 인플레 수습 때문에 기용돼 통화개혁 단행, 경제재건 5개년 계획을 추진했으나 이기붕 세력의 발호와 함께 중석불 사건, 간장사건에 책임지고 물러났다.
중석불 사건은 대한중석이 정부보유달러로 밀가루·비료를 수임해 막대한 이익을 남긴 사건이며, 간장사건은 바닷물에 물감을 타 간장으로 속여 군납한 사건이다.
1공 마지막 총리인 변영태 총리는 사사오입개헌으로 이 대통령의 장기집권 길을 터주고 총리직 폐지와 함께 물러났다.
그후 6대 총리는 4·19이후 과도정부 수반을 맡아 4개월간 개헌, 5대 총선, 정부이양을 한 허정씨였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총리는 대통령제 하의 총리와는 위상이 달랐다. 총리가 행정부를 이끌고 대통령은 상징에 불과했다.
그러나 온건·친미적인 장면총리는 과거와의 단절 인사조치에 미온적이었고 미국의 전 실업자에게까지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인정하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감군 계획까지 세우면서도 군내 쿠데타움직임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고 민주당 신·구파의 파벌싸움 틈바구니에서 시달렸다.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이승만 하에서 미국병원 선으로 피신했듯이 그는 다시 수녀원으로 피신, 닷새만에 나와 사퇴했다.

<정일권씨 최 장수>
5·16쿠데타직후 군부는 장도영씨를「얼굴총리」로 내세워 행정수반을 맡겼다.
장씨는 철저히「주체세력」에 의해 소외된 채 군정단축론을 펴다 반혁명인사로 몰려 2개월만에 물러났고, 이어 등장한 송요찬씨도「얼굴총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재무장관 출신으로 수반이 된 김현철씨는 통화개혁의 실패와 잇따른 반혁명사건, 민정이양촉구와 학생데모 속에 자신의 경제안정구상을 제대로 퍼보지도 못한 채 물러섰다.
3공이 정식 출범한 뒤 첫 총리는 최두선씨. 박대통령의 삼고초려 끝에「방탄내각」의 별명을 달고 출범한 최 내각은 5·16세력과의 동질성이 결여돼 혁명주체들과 충돌했다. 심지어 대통령의 개각의사를 정면 거절까지 한 끝에 일괄 사퇴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정일권 총리는 6년7개월이나 재직해 최 장수를 누렸다.
정 총리는 한일국교정상화와 경제개발이란 박대통령의 초기 정책목표를 수행,「돌격총리」란 별명을 얻었다.
경제이론보다 의지가 강조됐던 초기와 달리 어느 정도 성장궤도에 들어서자 박대통령은 어려워지는 경제운용을 백두진 총리에게 맡겼다.
그러나 8대 국회의원선거와 7대 대통령선거를 치른 뒤 공화당과의 관계가 좋지 않고「선거관리내각」으로서의 역할이 끝나자 6개월만에 물러나야 했다.
백 총리 후임으로는 명실공히「정치총리」인 김종필 총리가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당내 반대파의 방해공작, 청와대 및 중앙정보부의 견제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사법파동·광주대단지 사건 등 시련으로 시작한 김 총리는 남북대화·김대중 납치사건·유신 등 자신을 배제한 채 일어난 엄청난 사건들을 국내외적으로 수습하는데 힘써야했다.
결국 75년「건강상의 이유」를 내세워 총리직을 떠났다.
김 총리는 1인체제로 절대화한 권력 밑에서 후계자로 지목된다는 것이 어떤 시련을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주는 표본으로 자주 거론됐고 그 자신도 5정조 이런 교훈을 현재의 노태우 대통령에게 일러준 바 있다.
김 총리 후임에는 당시 대통령외교안보담당 특보였던 최규하씨가 임명됐다. 최 총리는 김 총리와 대비해 정치적 색채가 전혀 없는「실무총리」이었다.
최 총리의 임명만 봐도 박대통령이 2인자에 대한 경계심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최 총리는 일상적인 업무에서 대통령의 대행노릇을 그 누구보다 충실히 해「대행총리」,특히「대독총리」로 불렸다.
그 때문에 모든 행정력은 청와대로 집중됐고 말기의 YH사건·김영삼 총재제명사건·부마사태 등도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최 총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10·26) 대통령권한대행이란 직책이 맡겨진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피선된 뒤 신현확 총리에게 조각을 맡겼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국내정치흐름을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강압에 의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치욕을 안았다.
신 총리는 권력의 공백 속에서 전무후무한「진짜 총리」로서 과도기의 어려움을 맞았다.
그러나 신 군부가 권력을 틀어쥔 상태에서 야당과 재야는 구체제의 잔재로 몰아치고, 여당과는 스스로 인연을 끊은 틈바구니를 헤쳐나가다 광주사태등 대규모 소요사태의 책임을 지고 박충훈 총리서리에게 바통을 넘겨야 했다.
박 총리는 임명되자마자 광주로 내러가 사태수습의 얼굴역할을 했고, 며칠 후 발족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의 뒷받침이나 하는 역할을 5공 출범 때까지 했다.

<실세총리로 부각>
6공이 출범하면서 국무총리의 위상은 크게 변했다.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권력의 판도는 대통령집무실 문고리에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대통령과의 접촉빈도가 중요한데 매주금요일 대통령과 총리의 독대가 정착됐다.
또 고도의 정치문제나 고위급 인사 외에는 대부분 총리를 거치거나 총리실에서 조정토록 업무의 대폭적인 위임을 했다.
이 때문에 6공 정부의 첫 총리인 이현재 총리는 역대 어느 총리보다 활발하게 독자적인 영역을 가질 수 있었다.
또 5공과의 단절을 위한 6공의 노력에 그의 이미지로 일역을 할 수 있었다.
이 총리에 비하면 그 후임인 강영훈 총리는 민주화과정에 이완된 준법정신을 다잡는 실무형이다.
그러나 그 스스로「퇴임이후」를 기대하지 않아 김종필 총리이후 가장 실세총리란 평을 받았다.
총리실 관계자들은 이전엔 총리실을 거치지 않고 청와대로 바로 가져가던 부처 보고내용도 꼬박꼬박 총리실을 거치고 있고, 심지어 국방관련 비밀내용도 장관이 직접 총리실로 와 구두로라도 사전보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김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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