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광형의 퍼스펙티브

첨단 재생의료 활성화 막는 한국판 ‘붉은 깃발법’ 없애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첨단 의료기술 육성 전략 

이광형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이광형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영국은 산업혁명의 발상지답게 자동차도 처음 만들어 이용했다. 그러나 자동차가 등장하자 기존의 마차업자들과 마부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그래서 영국은 1865년 자동차의 등장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마차를 보호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다. ‘붉은 깃발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은 자동차 한 대에는 반드시 운전사·기관원·기수 등 세 명을 두도록 했다. 시내에서 최고 속도는 시속 3.2㎞로 제한했다. 기수는 낮에는 붉은 깃발, 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55m 앞에서 차를 선도하도록 했다. 즉 자동차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붉은 깃발을 앞세워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자동차가 마차보다 빨리 달릴 수 없게 했다.

붉은 깃발법은 1896년까지 31년간 유지했다. 이 법은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옥죄면서 산업의 주도권을 독일·미국·프랑스 등에 내주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국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에는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19세기 영국, 시대착오적 규제로 신생 자동차 산업 발목 잡아
21세기 한국은 세포·유전자 치료 분야서 비슷한 실책 되풀이
전 세계 재생의료 시장 규모 2028년 280조원으로 커질 전망
재생바이오법 개정안 국회 통과는 다행, 시행령도 정비해야

난치성 질환 치료법으로 주목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우리 몸에 병이 생겼을 때 전통적인 방식은 주로 화학 물질을 먹거나 몸에 주입하는 식으로 치료한다. 반면 세포치료 기술도 있다. 살아있는 세포를 배양해 몸에 주입함으로써 질환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세포치료는 기존 치료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난치성 질환에서 새로운 치료법으로 기대를 모은다.

세포치료는 크게 체세포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로 나눌 수 있다. 체세포 치료는 환자의 체세포를 채취·배양해 환자의 몸에 주입한다. 새로운 세포가 몸에 많이 들어가 손상된 세포를 대체한다. 체세포 치료제에는 피부 화상, 흉터, 퇴행성 관절염 등에 적용하는 피부세포 치료제와 연골세포 치료제 등이 있다. 인간의 피부나 심장 세포를 채취해 배양하기 위해서는 인체 내부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영양분을 제공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초정밀 세포 배양 시스템이 구축돼 있어야 한다.

줄기세포 치료는 줄기세포를 배양해 환자의 몸에 주입한다. 줄기세포란 한 개의 세포가 다양한 종류의 세포로 발전할 수 있는 세포를 말한다. 이런 줄기세포는 손상된 신체 부위의 세포들을 재생할 수 있다. 줄기세포는 피부 조직의 노화, 퇴행성 질환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으로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심혈관질환, 관절염, 당뇨병 등에 줄기세포 치료가 사용된다. 뇌·척수 신경이나 심장 근육이 손상됐을 때 환자의 회복을 도와줄 수도 있다.

유전자치료는 유전자에 결함이 있는 사람에게 유전자 편집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채취한 체세포나 줄기세포에서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제거해 정상적인 세포로 만든다. 그리고 이 정상 세포를 배양하고 환자의 몸에 주입해 치료한다. 유전자 치료는 유전병에 대한 치료법으로 크게 기대를 받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세포치료(체세포 치료와 줄기세포 치료)와 유전자치료를 첨단재생의료라고 부르기도 한다.

줄기·면역세포 연구개발도 활발

초기에 허가받은 세포치료제는 주로 피부세포나 연골세포를 이용한 피부재생·연골결손 치료제였다. 최근에는 암, 퇴행성 질환을 타깃으로 하는 줄기세포와 면역세포에 대한 연구개발이 활발해지고 있다.

세포치료나 유전자치료의 경우 기존 치료제보다 근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다. 암과 신경 퇴행성 질환, 유전병 등 난치성 질환의 치료를 가능하게 해줄 기술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재생치료제는 연구개발과 상업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주입된 세포의 효과 미흡, 생명윤리와 관련된 이슈 등이 주된 원인이었다.

최근 들어 세포의 배양·조작 기술과 유전자의 분석·조작 기술 등의 발전으로 기술적 문제들이 상당히 해결되고 있다. 많은 세포치료제와 유전자치료제 제품들이 미국과 유럽 등에서 허가를 받으면서 제도적인 면도 정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지난해 발표한 첨단재생의료 전략포럼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재생의료 시장 규모는 2028년 280조원으로 2017년(30조원)의 아홉 배 이상으로 커질 전망이다. 이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22.7%로 추산된다. 전체 바이오 의약품 시장에서 재생의료의 비중은 2021년 약 1%에서 2030년에는 약 30%로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에선 2016년 419억원이었던 재생의료 시장이 2026년에는 4190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내 바이오의약품 시장에서 재생의료가 1% 남짓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계산이다. 전 세계 바이오 의약품 시장으로 보면 0.1% 수준으로 미미하다.

매년 1만~2만 명이 해외 원정 진료

한국이 재생의료 시장에서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규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유달리 이러한 연구와 시술에 규제가 많아서 이 분야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매년 1만~2만 명이 주변 국가에 가서 세포치료를 받고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치료비는 1인당 최대 1억원씩 든다고 한다. 해마다 약 1조원의 외화가 외국으로 빠져나간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시작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이 분야는 계속 급성장할 것이고 해외로 유출되는 외화의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의 붉은 깃발법과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다시 산업을 옥죄고 있다.

한국은 2019년 첨단재생바이오법(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재생의료 발전의 초석을 만들었다. 국회는 지난 2월 첨단재생바이오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재생의료 대상자를 희소성이나 난치성 질환자로 제한하지 않고 폭넓게 적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재생의료를 임상시험뿐 아니라 시술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제한을 없앴다. 다만 시술에 앞서 전문가위원회 심의를 거쳐 허가를 받도록 했다. 매우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임상연구 제약하는 규제 풀어야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앞으로 정부가 할 일은 시행령을 제대로 고쳐 법 개정의 효과가 제대로 반영되게 하는 일이다.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첫째, 실험실 연구 결과가 임상연구로 원활히 이어지도록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실험실에서 수행한 줄기세포 치료 연구로 임상 연구 허가를 받으려면 세포를 채취하는 시점부터 모든 절차가 정부가 허가한 세포 처리시설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연구기관이나 중소병원에서는 자체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은 세포 처리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실험실 연구가 임상 연구로 연결되는 데 있어 제약이 많다.

미국의 경우에는 ‘연구자 임상 트랙’이라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즉 연구 실험실에서 생산한 줄기세포라도 그 생산 과정이 잘 검증된다면 연구자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예외 조항을 두고 실험실 연구가 임상 연구로 원활히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둘째, 연구기관이나 중소병원이 대기업이나 국가의 치료제 생산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는 연구자가 대기업이나 병원, 국가시설을 이용해 세포를 직접 배양하는 게 매우 어렵게 돼 있다. 개방형 국가 재생의료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관련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치료제 생산 시설을 개방형으로 하면 비용절감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현재는 세포치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일반인들이 이용하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셋째, 재생의료 실시 여부의 심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심의위원회에 연구자의 참여가 필요하다. 이들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선진국 수준의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심의를 너무 까다롭게 하면 연구가 활성화하지 못한다. 그러면 선진국보다 뒤처진 기술 수준을 회복하기 어렵다. 시술의 경우도 포괄적인 허용 방침으로 해야 한다. 해외 원정 진료가 더는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한국판 붉은 깃발법이 일부라도 개선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그동안 뒤처진 기술 수준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더욱 과감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규제를 논할 때는 국내 요소만 볼 것이 아니라 국제 경쟁과 국부 유출 가능성까지 봐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됐다.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