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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센터와 US스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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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1989년 10월 31일 뉴욕타임스 1면에 ‘일본인, 뉴욕의 상징을 사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맨해튼 한복판의 록펠러센터를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사들였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역사기념물로도 지정된 이 건물의 매각이 준 충격은 상당했다. 입주해 있던 GE와 NBC 방송 등 유수의 미국 기업들이 한순간에 일본의 세입자가 된 점마저 못마땅해했다.

소니가 컬럼비아 영화사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반일감정으로까지 번졌다. 지금은 할리우드 영화의 빌런(악당)이 대부분 러시아인, 중국인이지만 당시엔 일본인 재벌이나 야쿠자였다. 의회에서도 일본 자본의 투자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지난 10일 미국 백악관 국빈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일 미국 백악관 국빈만찬에서 건배를 하고 있는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0일 백악관 미·일 정상회담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반대 의사를 재확인했다. “노동자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였다.

피츠버그에 본사를 둔 US스틸은 1901년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스틸과 합병해 세워졌다.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노조는 차라리 미국 회사인 클리블랜드 클리프스가 새 주인이 되길 바랐지만, 반독점법에 걸려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바이든 대통령은 “한 세기 이상 미국 철강산업의 상징이던 US스틸을 미국 회사로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뜻 보면 지난 30여 년간 상황은 별로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자유 시장경제라면서 경제 논리와는 안 맞는 이유로 여전히 거래가 막혔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주 만난 한 전직 미국 관료는 록펠러센터 매입 때와 지금의 일본은, 미국에 전혀 다른 나라라고 말했다. 바이든도 선거를 앞두고 노동자 표를 의식해 그런 것이지, 연말 이후 US스틸 합병 작업은 급물살을 탈 거라고 봤다.

게다가 일본이 미·영·호주의 군사 동맹인 ‘오커스’ 협력국이 된 마당에 안보를 핑계로 보호주의를 할 명분도 사라졌다.

실제 정상회담 직후, US스틸은 주주총회를 열고 일본제철과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의 심사가 남았지만, 동맹국과의 거래를 막은 사례는 거의 없었다.

벌써 일본은 이런 지위를 백분 활용하는 모습이다. 얼마 전 미국 항만의 중국산 크레인을 모두 교체하기 위한 200억 달러(약 27조원) 규모의 계약을 따간 것도 일본 미쓰이였다.

30여 년 전 ‘엔화를 앞세운 침략자’였던 일본은, 이제 중국이란 더 큰 빌런에 함께 맞서는 동맹군으로 미국 시장에 다시 스며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