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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 무서워 도로 질주한 육상이… 동물들의 이유 있는 탈출

중앙일보

입력

지난 4일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진사리 목장에서 10개월령 송아지 육상이(오른쪽)가 울타리 밖을 응시하고 있다. 육상이는 구제역 백신 접종 주삿바늘을 보고 울타리를 넘어 경부고속도로까지 달렸다.손성배 기자

지난 4일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진사리 목장에서 10개월령 송아지 육상이(오른쪽)가 울타리 밖을 응시하고 있다. 육상이는 구제역 백신 접종 주삿바늘을 보고 울타리를 넘어 경부고속도로까지 달렸다.손성배 기자

지난 4일 오후 경기 안성시 공도읍 진사리의 한 한우 사육 농장. 사흘 전 농장 밖으로 탈출했다가 3시간 여 만에 포획된 10개월령 송아지의 다리와 둔부엔 아물지 않은 보랏빛 상처가 있었다. 샌드위치 패널로 덧댄 울타리를 넘어가다 생긴 찰과상이다. 송아지 이름은 ‘육상이’다. 약 10년 동안 한우를 사육한 목장 주인 이모(50대)씨는 “소가 그렇게 잘 뛰는 건 처음 봤다”며 “탈출 사건 이후 육상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말했다.

목장 주인 이씨는 육상이가 도망쳤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주삿바늘을 보여줬다. 손성배 기자

목장 주인 이씨는 육상이가 도망쳤을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주삿바늘을 보여줬다. 손성배 기자

육상이는 지난 1일 구제역 백신 접종 주사를 맞기 직전 탈출했다. 이씨가 다가간 순간 육상이는 물통이 있는 우리 틈으로 머리를 밀더니 약 1.5m 높이 울타리를 넘었다. 밭을 내달리고는 야산을 넘어 이씨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후 목장에서 직선거리로 7.8㎞ 떨어진 경부고속도로 부산방향 안성분기점 인근에서 구조됐다. 119구조대 전화를 받고 육상이와 재회했던 이씨는 “주삿바늘이 무서웠나 보다. 아이를 잃어버린 것 이상으로 걱정돼 전전긍긍했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 활동을 했던 오산소방서 119구조대 김민섭 소방교는 “송아지가 고속도로에서 2~3㎞ 이상 뛰어다녀 사고 염려가 컸다”며 “지나가던 트럭과 함께 구조 장비차로 송아지를 막고 목에 줄을 걸었더니 지친 듯 옆으로 푹 쓰러졌다”고 설명했다.

지난 1일 안성시 공도읍 진사리 목장을 탈출해 직선 거리 7.8㎞ 떨어진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포획된 10개월령 송아지 육상이가 탈출한 물통 구멍과 울타리(빨간 원 부분), 손성배 기자

지난 1일 안성시 공도읍 진사리 목장을 탈출해 직선 거리 7.8㎞ 떨어진 경부고속도로 위에서 포획된 10개월령 송아지 육상이가 탈출한 물통 구멍과 울타리(빨간 원 부분), 손성배 기자

최근 동물들이 도심과 고속도로에 잇달아 출현하면서 시민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난달 26일 성남 중원구의 한 생태체험장에선 4년령 수컷 타조 타돌이가 탈출했다. 철제 울타리를 뚫고 나와 도로를 뛰어다니다가 1시간여 만에 포획됐다. 파주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타돌이는 비슷한 시기 부화해 함께 자란 타순이와 함께 4개월령쯤 체험장에 왔다. 하지만 지난 2월 타순이가 갑자기 숨진 뒤 혼자 지냈다고 한다.

체험장 주인 마원(50대)씨는 “타순이가 죽은 뒤 타돌이가 스트레스를 받고 외로워하는 것 같아서 새 짝꿍을 데려올 계획도 있다”며 “타돌이가 뚫고 나갔던 울타리 하단부를 더 튼튼하고 두꺼운 파이프로 보강했다”고 말했다. 마씨는 “타돌이가 무사히 돌아오고 인명 사고도 없어서 정말 다행스럽다. 놀란 시민들에게는 송구한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5일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생태체험장에 사는 타조 타돌이가 주인 마원씨와 교감하고 있다. 타돌이는 지난달 27일 오전 9시30분쯤 우리를 탈출해 도심 도로를 배회하다 상대원동 공장 앞에서 포획됐다. 손성배 기자

5일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생태체험장에 사는 타조 타돌이가 주인 마원씨와 교감하고 있다. 타돌이는 지난달 27일 오전 9시30분쯤 우리를 탈출해 도심 도로를 배회하다 상대원동 공장 앞에서 포획됐다. 손성배 기자

지난해 3월엔 서울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4년령 얼룩말 세로가 탈출했다가 마취총 7발을 맞고 3시간 만에 포획됐다. 세로는 파손된 나무 울타리를 통해 바깥으로 나와 도심지를 활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슬픔 때문에 탈출했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동물권 단체에선 “탐색 본능이 발현됐던 것일 뿐 사람 감정을 동물에게 대입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지난해 8월엔 경북 고령군 관광공원에서 암사자 사순이가 1시간 만에 사살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사순이는 관리인이 우리를 청소하러 들어갈 때 열린 문틈으로 나와 약 20m 떨어진 숲에서 쉬다가 사망했다. 당시 “사육 환경과 안전시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에 소중한 생명이 희생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탈출 얼룩말 '세로'. 사진 서울어린이대공원

탈출 얼룩말 '세로'. 사진 서울어린이대공원

동물권 단체와 전문가들은 동물별 기준에 맞는 사육 환경을 갖추고 탈출했을 경우 안전하게 포획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진경 동물권 행동 카라 대표는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동물을 맹수라는 이유로 사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동물원이나  체험장 등 시설에서 고통받는 전시 동물을 보호할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소, 돼지 등 가축도 마찬가지로 생존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형주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 대표도 “영국에선 가축과 야생동물에 대해 사육·운송·보호 단계별로 취급 기준을 만들고 지키게 한다”며 “탈출한 동물에게 사람의 감정을 대입해 이유를 찾기보다 동물들이 불편함이나 통증,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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