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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버핏의 오마하 주총처럼 우리 주총도 주주 축제가 돼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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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기업 밸류업 발표 이후 주총 달라졌나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워런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정기 주주총회는 매년 5월 초 미국 네브래스카주의 소도시 오마하에서 열린다. 올해는 5월 4일인데 주총 전날은 주주들을 위한 쇼핑 데이가, 주총 당일 저녁엔 피크닉이, 주총 다음날은 마라톤(혹은 조깅 내지 걷기) 대회가 이어진다. 쇼핑 데이엔 칵테일을 즐기며 버크셔 해서웨이가 투자한 자회사 제품을 주주 할인가로 살 수 있다. 주총 행사는 이렇게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박 3일간 축제처럼 열린다. ‘자본주의의 우드스톡’이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우드스톡’ 오마하 주총

지난해 5월 6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 [AP=연합뉴스]

지난해 5월 6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 [AP=연합뉴스]

가장 주목받는 행사는 역시 주총 당일 버핏 등 최고경영진과의 Q&A다. 주주뿐만 아니라 언론도 버핏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지난해엔 6년째 참석한다는 13세 소녀 데프니의 노숙한(?) 질문이 화제였다. “미국 국가부채가 31조 달러로 국내총생산(GDP)의 125%에 달한다. 연방준비제도(Fed)는 인플레이션과 싸운다고 하면서도 몇조 달러를 찍어낸다. (약달러를 예상하고) 중국·사우디아라비아·브라질 등은 달러에서 손을 뗀다. 미래에 달러가 더 이상 기축통화가 아닌 상황을 버크셔 해서웨이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저 소녀를 연단에 모셔 답변을 들어야겠는데요”라고 농담한 버핏은 곧 진지해졌다. “다른 어떤 통화도 달러 같은 기축통화가 될 가능성은 없다. 국제무역에서 달러 이외 통화의 결제비율이 높아지고 있지만 달러를 대체하는 수준은 아니다.”

버크셔 해서웨이 2박3일 주총…쇼핑, 질의응답, 마라톤 행사
행동주의 펀드 절반의 성공, 사외이사 확보 등 영향력 커져
몰아치기 주총 여전…카카오는 제주도 평일 오전 9시에 열어

몰아치기 주총, 소액주주 참석 어려워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AP=연합뉴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AP=연합뉴스]

주주와 경영진과의 격의 없는 소통, 쇼핑에 체육행사까지 어우러진 잔치 같은 주총, 한국 투자자들은 오마하에서 열리는 주총이 부럽다. “우리 기업들도 버크셔 해서웨이와 같은 주주총회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주들이 대표이사에게 당당히 질문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직접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자리를 통해 대표이사가 갖는 경영철학과 관점, 사업의 방향성, 주주를 대하는 태도가 드러나게 된다.”(박영옥·김규식 『주주 권리가 없는 나라』)

한국의 주총은 어떨까. 매년 3월 말에 주총이 몰리는 현상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난달 28일은 ‘슈퍼 주총 데이’였다. 코스피·코스닥 상장사의 3분의 1인 700여 곳이 이날 주총을 했다. 과거에는 소액주주 의결권을 대리하는 시민단체의 참여를 어렵게 하기 위해 같은 날 ‘몰아치기 주총’을 했다지만 요즘엔 주총에서 시민단체를 별로 볼 수 없는데도 기업은 같은 날 주총을 여전히 선호한다. 소액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폭넓게 보장하겠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신임 대표이사도 불참한 카카오 주총

지난달 20일 경기도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총에서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하트’가 공연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달 20일 경기도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총에서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하트’가 공연했다. [사진 삼성전자]

지난달 28일은 목요일, 평일이다. ‘28일 오전 9시 제주’에서 열린 주총엔 주주들이 얼마나 참석했을까. 그냥 기업도 아니고 삼성전자 다음으로 많은 185만 명의 주주가 있는 ‘국민주’ 카카오 얘기다. 카카오는 다음커뮤니케이션과 2014년 합병한 뒤 본사 소재지인 제주에서 매년 주총을 열고 있다. 이날 참석한 ‘일반 주주’는 회사 직원과 노조원을 제외하면 10명이 채 안 됐다. 주총에서 새로 선임된 정신아 대표이사도 주총에 참석하지 않았다. 2021년 17만 원대였던 주가가 요즘 5만 원대로 3분의 1토막이 났기에 참석한 주주들이 주가 질문을 던졌지만 이날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홍은택 대표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순 없었다. 전자투표 등으로 안건 의결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주총 참석이 어려운 주주들의 접근성을 높일 수 있는 주총 온라인 중계는 하지 않았다.

올해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중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 등 20개사는 주총을 온라인으로 내보냈다.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은 대표이사뿐만 아니라 주요 임원진이 총출동해 주주와의 대화에 나섰다. 주총이 단순히 의결 절차를 넘어서 경영진과 소통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올해는 정부가 발표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맞물려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환원 요구가 어느 때보다 거셌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을 받은 한국 기업은 2019년 8곳에서 지난해 77곳으로 9.6배 증가했다. 하지만 정작 올해 주총 뚜껑을 열어보니 요구를 관철한 행동주의 펀드는 많지 않았다.

행동주의 펀드, 삼성물산·KT&G에 져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AP=연합뉴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AP=연합뉴스]

삼성물산을 상대로 회사의 현금창출 능력을 웃도는 수준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를 요구했던 시티오브런던 등 5개 행동주의 펀드는 늑대처럼 떼 지어 공격하는 ‘울프 팩(wolf pack)’ 전략을 썼지만 주총에서 패했다. 행동주의 펀드가 IBK기업은행과 함께 방경만 KT&G 사장 선임에 반대했지만 무위에 그쳤다. 자신들이 미는 사외이사 한 명을 확보했을 뿐이다. JB금융지주와 태광산업에도 행동주의 펀드가 지지하는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에 입성했다. 주주제안으로 이사를 선임한 건 국내 금융지주에서 JB금융지주가 처음이다. 태광산업도 2007년 장하성 펀드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주주 제안으로 이사를 선임했다. 주총 전에 기업 스스로 경영진 등 이사 보수의 총액 한도를 줄인 기업도 있었다(삼성전자·SK·LG 등).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한국ESG기준원에 따르면 지난해에도 행동주의 펀드들이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소각은 관철하지 못했지만, 이사 해임(45.5%)이나 감사·감사위원 선임(31.6%) 등의 주주 제안 가결률은 꽤 높았다. 주주 제안 전 단계인 공개 주주서한 발송도 2020년 4개사에서 2022년 13개사(28건)로 늘었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 기업이 1년간 9건의 공개서한을 받기도 했다”고 전했다. 행동주의 펀드가 그래도 ‘절반의 성공’은 거뒀다고 볼 수 있다.

행동주의 펀드의 빛과 그림자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행동주의 펀드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배당과 자사주 소각에 인색했던 한국 기업의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오너 등 지배주주의 이익만 챙기는 기업의 체질 변화를 이끈 점이 공(功)이라면, 지나친 단기 실적주의로 ‘거위의 배를 가르는’ 주주 환원을 요구하고 자기 이익만 챙기고 ‘먹튀’ 한다는 점은 과(過)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주총장 주변 풍경. 회사가 투자한 회사의 주요 제품으로 쇼룸을 꾸몄다. [로이터=연합뉴스]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날린 이는 미국 저널리스트인 라나 포루하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존재감이 약해진 애플을 보면 그의 지적을 대놓고 반박하기 힘들다. 포루하는 “가장 선망받는 기업인 애플이 전통적인 기업 활동이 아니라 ‘금융 공학’을 통한 돈벌이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애플의 자사주 매입과 배당은 기업 경영진과 대주주의 배만 불리고, 기업 자체의 중장기적 혁신 역량과 일자리 창출 능력, 경쟁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애플을 그 길로 이끈 건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같은 월가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포루하는 “단기적 성과를 내라는 압박이 가중되다 보면 경제 성장의 핵심인 기업 활동의 동력이 훼손될 수밖에 없다”며 “오늘날의 기업공개(IPO)는 신생 기업이 훌쩍 커 나갈 새로운 기회의 장이 아니라 성장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 됐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금융과 실물경제, 즉 거저먹는 자(taker)와 만드는 자(maker) 사이의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라나 포루하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증권가에선 주주 환원을 강화하는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행동주의 펀드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기업 입장에서는 이익 극대화를 통한 주주 환원뿐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사회적 기여에도 동참해야 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며 “미국도 1980년부터 퇴직연금 활성화 등의 영향으로 투자 지형이 개인에서 기관투자자로 바뀌었고, 기업 이사회 내 독립 이사진의 비중이 1985년 30%에서 1990년 60%로 급증하며 주주 환원이 개선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서 주주권 과잉 걱정은 우스워”

워런 버핏의 소탈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2019년 주총 때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워런 버핏의 소탈한 성품을 느낄 수 있는 2019년 주총 때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근 기고에서 “과도한 단기주의 등 주주권 과잉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제대로 된 주주 자본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한국 증시에서 주주권 과잉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증시의 밸류업을 위해서는 “기업에 대한 직접적 인센티브와 페널티보다 제도 개선을 통해 주주권이 잘 행사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절실하다”고 했다.

소액주주의 합리적인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자. 전자주총이 가능하도록 하는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과도한 상속세도 문제지만 우선 상속세를 지금처럼 시가가 아니라 순자산가치로 평가하자. 상속을 앞둔 지배주주가 일부러 주가를 떨어뜨릴 유인이 사라진다. (박영옥·김규식)

올해 주총에서 삼성전자는 자사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의 대상인 중소기업 12개사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상생마켓을 열고,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공연도 했다. 모쪼록 주총이 좀 더 즐겁고 유익한 주주들의 잔치가 됐으면 한다.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까지는 아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