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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75화. 수메르 신화와 홍수

중앙일보

입력

자연에 맞서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의 지혜

19세기 말, 현재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 남서쪽에서 놀라운 물건이 나타났습니다. 성경 속 바빌론의 수도를 장식했던 이슈타르 문의 조각이 발견된 것이죠. 십수 년에 걸쳐 발굴된 많은 양의 조각은 전쟁의 혼란 속에 여기저기 흩어졌지만 다시 모여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수천 년 세월을 넘어 파랗게 빛나는 거대한 문은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위용을 드러내며 고대 문명의 신비를 느끼게 해 주었죠. 이슈타르 문을 만든 이들은 최초로 밀과 보리를 뿌려 농사를 시작하고, 강물을 길어 밭에 물을 대며 자연에 맞서 거대한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이슈타르의 문을 만날 수 있다. 1900년대 초기에 바빌론에서 발굴한 벽돌들을 독일로 가져와 재현한 것으로, 거대한 바빌론 도시를 감싸는 성벽의 일부였다. 이슈타르 문은 마르두크 신을 상징하는 용(무슈슈 혹은 무슈후슈)을 비롯해 사자와 황소, 그리핀 등 각종 조각·무늬도 아름다워 훌륭한 예술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서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이슈타르의 문을 만날 수 있다. 1900년대 초기에 바빌론에서 발굴한 벽돌들을 독일로 가져와 재현한 것으로, 거대한 바빌론 도시를 감싸는 성벽의 일부였다. 이슈타르 문은 마르두크 신을 상징하는 용(무슈슈 혹은 무슈후슈)을 비롯해 사자와 황소, 그리핀 등 각종 조각·무늬도 아름다워 훌륭한 예술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그들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이름의 큰 강 둘 사이에 도시를 세우고, 벽돌로 신전을 만들었어요. 마치 신들의 세계를 향하듯 하늘 높이 솟은 신전, 성경 속 바벨탑은 바로 여기에서 온 것이죠. 그로부터 수천 년, 위대한 문명은 사라지고 사막만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점토판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적어 후대에 남겼어요. 지금으로부터 약 7500년 전인 기원전 5500년경부터 시작하는 가장 오랜 신화와 전설을 남긴 사람들. 사람들은 그들을 수메르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수메르 신화는 현재 기록상 가장 오래된 신화인데요. 그리스 신화가 로마인들에게 이어져 계승되며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부르듯, 수메르 신화 역시 뒤를 이은 아카드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로 이어지며 메소포타미아 신화라는 이름으로 엮여서 소개됩니다. 가장 오래된 영웅 이야기인 길가메시 서사시도, ‘눈에는 눈으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남긴 유산이죠.

수메르 신화는 많은 신화가 그렇듯 혼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존재하던 바닷물과 민물이 서로 맺어져 수많은 신을 낳았다고 하죠. 최초로 황무지에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시작한 수메르인들 다운 이야기입니다. 이들로부터 태어난 하늘의 신이 여러 자식을 낳아 그중 둘째가 지상에 군림하니, 그가 바로 바람과 질서를 다루는 신 엔릴입니다.

폭풍의 신이기도 했던 그는 신들이 제각기 자기 일을 다 하게 시켰죠. 지상에는 엔릴 외에도 여러 신이 있었는데 그중 이기기라 불리는 작은 신들은 50명의 높은 신, 아눈나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습니다. 물론, 아눈나도 제각기 자기 일을 했지만 이기기들이 보기엔 놀고먹는 것 같았던 모양이에요. 농민들이 고대 세계의 지배자들, 가령 왕이나 신관을 볼 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였죠. 그들은 ‘우리만 일할 수 없다’며 연장을 부수고 일을 거부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노동 쟁의, 파업을 일으킨 것이죠. 놀란 아눈나들은 회의를 열었고, 그중 지혜의 신 엔키가 꾀를 냅니다. 바로 그들을 대신해 일할 존재, 인간을 만든 것이죠.

‘피를 모아 뼈를 만들겠습니다. 미개인을 만들어 그를 ‘인간’이라 부를 것입니다. 나는 실로 미개한 사람을 창조하렵니다. 인간들은 신들에게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바빌로니아 신화에 등장한 한 대목입니다. 인간은 신을 위해 만들어진 노예라는 이야기인데요. 이는 여러 SF와 판타지 작품에 영감을 주었죠. 신에 의해 태어난 인간은 신을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당연히 불만은 있었어요. 이따금 들려오는 불만을 불쾌하게 여긴 엔릴은 신들의 회의를 열어 폭풍의 힘으로 인간을 없애자고 합니다. 엔키를 비롯한 많은 신이 반대했지만, 한번 결정한 엔릴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죠. 그 결과 땅을 휩쓰는 홍수가 일어나 인간을 쓸어버립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신들조차 놀랄 정도였죠.

하늘로 올라갔던 신들이 지상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지상은 대홍수로 인해 텅 빈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신들을 위한 제물도 사라졌다는 것이죠. 인간이 만들어진 뒤 연장을 놓아버린 작은 신들은 일을 잊어버린 상태. 신들이 처음으로 굶주림을 경험하면서 후회할 때, 엔키가 숨겨놓았던 인간을 소개합니다.

성경 속의 노아처럼 엔키가 이 사실을 미리 알려서 대피하게 했던 것이죠. 그 인간이 준비한 제물로 신들을 위한 잔치가 열리고, 신들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내려줍니다. 물에서 태어난 신들에 의해 만들어져, 물을 다루며 살아간 사람들. 수메르인들은 자연의 힘이 위대하고도 무섭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를 다루는 신들에게 감사하며 노력했죠.

그들이 일만 하며 살아간 건 아닙니다. ‘인생은 짧다. 그러니 (돈을) 쓰자. 하지만 너무 짧은 건 아니다. 그러니 저축도 하자.’ 수메르 문명에서 남겨진 한 점토판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죠. 그들은 일과 함께 삶을 즐기는 동시에, 미래도 내다보며 준비했습니다. ‘앞날을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휩싸여서 인간을 멸망시키면 신도 굶게 된다’라는 수메르판 대홍수 신화의 결말에는 바로 그러한 수메르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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