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 위협하는 입마개가 될 때[BOOK]

중앙일보

입력

책표지

책표지

잘못된 단어

르네 피스터 지음
배명자 옮김
문예출판사

진보 성향의 신문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의 칼럼니스트로, 영어권 교양잡지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편집장인 이언 부루마는 2018년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다. 성폭행 고발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가 확정된 캐나다 록스타 지안 고메시의 책을 다뤘다는 이유에서다. 고메시는 이 책에서 자신이 ‘법원의 형사재판에선 무죄를 받았지만 대중의 도덕재판에선 죄인이 됐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루마는 계속 편집장으로 일하려면 사과하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독일 언론인으로 진보 성향 시사지 슈피겔의 미국 워싱턴 지국 편집장으로 일한 지은이는 부루마 사례가 ‘자유주의자들이 사방에서 공격받으며 자신의 자유 의지를 꺾고 표현의 자유를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 전형’이라고 평한다.

미국 민주당을 위해 일하는 여론조사 분석가 데이비드 쇼어는 흑인 용의자가 백인 경찰의 손에 폭력적으로 살해된 플로이드 사건 직후인 2020년 5월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 때문에 실직했다.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 암살 이후 벌어진 인종폭동은 주변지역 민주당 지지율을 2%P 가량 떨어뜨려 1968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글 내용은 프린스턴대 강사의 연구를 인용한 것. 실제로 닉슨은 당시 ‘법과 질서’를 내세워 당선했다. 하지만 쇼어의 포스팅은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는 운동을 방해한다는 오해를 받고 공격 대상이 됐다.

미국 테네시주에서 사람들이 지난 2월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기념하며 행진하는 모습. [Emily Ball/Bristol Herald Courier via AP=연합뉴스]

미국 테네시주에서 사람들이 지난 2월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기념하며 행진하는 모습. [Emily Ball/Bristol Herald Courier via AP=연합뉴스]

지은이는 이처럼 미국 좌파진영이 ‘정치적 올바름’을 중심으로 ‘취소문화’와 ‘정체성 정치’를 확산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신념‧행동 체계를 사회 전반에 강요해왔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용어선택이나 표현에서 인종‧민족‧젠더‧장애‧종교 등과 관련한 차별‧편견을 배제하자는 것. 취소문화(Cancel Culture)는 유명하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이 과거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발언‧행동을 현재의 기준으로 고발‧비난해 사회적 지위‧평판, 심지어 일자리를 잃게 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젠더‧성적지향‧장애‧민족‧문화 등 특정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활동이다.

일부에선 이런 흐름이 지나치면 획일주의‧전체주의‧근본주의 사회가 될 수 있으며, 자칫 집단의 압력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뉴욕타임스는 2022년 3월 미국이 현재 “자유로운 개인의 근본적 권리, 즉 욕을 먹거나 외면당할 우려 없이 자기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의견을 밝힐 권리”를 잃었다고 지적했다. 결과가 두려워 ‘일부 국민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여기는 미국인이 84%, 비난‧비판이 두려워 입을 닫은 지 오래라고 답한 사람도 55%나 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입막음은 미국 사회 전반의 도도한 현상이 되고 있다. 백인이 레게 머리를 하거나, 비유대인 블로거가 요리 잡지 사이트에 유대 전통 과자 사진과 레시피를 게시하면 ‘문화적 전유’라는 비판을 듣는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콜럼버스는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죽음에 빠뜨린 사악한 사업가로 교육된 지 오래됐다. 미국 건국기념일이 1776년 독립선언일이 아니라 1619년 첫 노예가 버지니아에 도착한 날이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 주장도 팽팽하다.

지은이는 도날드 트럼프와 미국 공화당이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일부 좌파의 근본주의와 권위주의적 위협을 외면하는 것은 사회적 ‘태만’이라고 지적한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이런 현상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비단 미국만은 아닐 것이다. 부제 '정치적 올바름은 어떻게 우리를 침묵시키는가'. 원제 Ein falsches Wor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