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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 없는 '2000 숫자 싸움'…의정 대치에 환자만 죽어난다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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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2일 오후 경기 평택시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2일 오후 경기 평택시 해군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악수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숫자는 힘이 세다.

총선을 2주 앞두고 ‘2000명’이란 숫자가 정국 중심에 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매년 5년간 늘리겠다는 ‘의대 2000명 증원’을 두고 정부와 의료계 충돌을 넘어 이젠 ‘당정 갈등’으로 번질 조짐이다.

여당은 지난주부터 ‘2000명 협상론’을 제기해왔다. 정부-의료계 대화 협의체에 의대 정원도 의제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까지 집단 사직을 하며 커진 국민 불안감에 중도층 이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특히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27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국민 건강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 좋은 결론을 내야 한다”면서 “어떤 의제를 배제하면 건설적인 대화가 어렵다”고 했다. 2000명 수치에 유연성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이 27일 경기 수원시 권선구 수원올림픽공원을 찾아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이 27일 경기 수원시 권선구 수원올림픽공원을 찾아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두 시간 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출입 기자단을 상대로 한 언론 브리핑에서 “지난 20일 2025학년도 의대 정원 대학별 배정을 이미 완료했다”고 말했다. 2000명은 건드릴 수 없다는 취지였다. 대통령실은 의료계와의 대화에서 2000명 증원은 사실상 논외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한 위원장의 요구는 의료계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해야 한다는 원론적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2000명 증원을 두고 당정 간에 균열이 벌어지는 건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대통령실은 2000명을 필수 의료와 지방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물러설 수 없는 정책의 숫자로, 여당은 타협이 가능한 정치의 산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의료개혁은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로, 당의 요구를 받아들인 ‘이종섭ㆍ황상무 리스크’와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2000명이란 숫자가 과학적 근거에 의해 결정됐다고 줄곧 밝혀왔다. 지난 6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각종 통계를 거론하며 의대 정원 확대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윤 대통령은 “건강보험이 처음 도입된 1977년 이래 국민 의료비는 511배나 증가했지만 의사 수는 7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며 “같은 기간 의대 정원이 1380명에서 3058명으로 겨우 2.2배 증원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제23차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법과 시스템의 문제도 2000명 증원에서 물러설 수 없는 이유로 거론된다. 의대 정원은 정부가 책임지고 결정할 사안으로 어떤 나라도 의사 단체와 협의해 결정한 선례가 없다는 주장이다. 의사 집단의 불법적인 집단행동에 물러서지 않는 건, 과거 화물연대의 불법파업에 원칙 대응을 했던 기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여당의 반발은 거세지고 있다. 특히 격전지가 많은 수도권에 출마한 후보들이 앞장서고 있다. 경기 성남분당갑에 출마한 안철수 의원은 27일 SBS라디오에서 “휴학한 의대생이 군대에 가면 내년에 인턴이 없어지고 군의관ㆍ공보의도 없어진다”며 “2000명이 아닌 4000명을 동시에 교육해야 한다. 완전 의료파탄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경원(서울 동작을) 전 의원도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증원 규모 조정은 초지일관 제 견해”라며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최대한 빨리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의대 증원 문제가 의사들의 강한 반발 속에 진척되지 못하자 윤 대통령은 물론, 한 위원장도 정치적 시험대에 올라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부의 랜드마크 정책이 된 2000명 증원을 성공시켜야 하는 윤 대통령의 입장과, 총선에 악영향을 우려하는 당내의 목소리를 관철해야 하는 한 위원장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 완강한 윤 대통령의 원칙론을 한 위원장이 유연하게 설득해야 할 상황이다. 당에서는 현재 ‘연 2000명씩 5년간 총 1만명’인 증원 규모를 ‘연 1000명씩 10년간 총 1만명’으로 속도를 조절하자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7일 오후 의사 집단행동 대비 현장점검을 위해 대전 중구 충남대학교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덕수 국무총리가 27일 오후 의사 집단행동 대비 현장점검을 위해 대전 중구 충남대학교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갈등의 장기화로 고통받는 건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다. 정부는 “의료 대란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전국의 주요 병원이 병동 운영을 대폭 축소하며 암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지 못하는 환자들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어떤 정부도 의대 증원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증원에만 성공한다면 사실 윤 대통령의 성과라 볼 수 있었다”라면서도 “2000명 수치로 논의가 집중되면서 윤 대통령의 불통 문제로 이슈가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 자체에 반대하는 국민이나 여당 의원은 없을 것”이라며 “대통령의 리더십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출구를 찾아내는 것이 정치의 영역이자, 총선을 앞둔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짊어져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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