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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배후는 우크라" 고집하는 푸틴...러시아 곳곳서 '테러 후유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 공연장 테러가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우크라이나가 배후라는 주장을 계속해, 전쟁 확대의 구실로 삼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러시아에서는 곳곳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허위 신고가 늘고 반이민 정서가 고개를 드는 등 '테러 후유증'으로 혼란이 지속하는 모습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모스크바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 테러 대책 회의 후 연설에서 "이번 범죄는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테러가 이슬람 무장단체의 소행이란 점을 처음으로 인정한 발언이다. 테러 직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분파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이 배후를 자처했지만,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지목해왔다.

그런데도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배후라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누가 그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지만, 이제는 누가 그것을 명령했는지 알고 싶다"면서다. 또 "테러리스트들이 왜 우크라이나로 도피하려고 했는지, 그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2014년부터 네오나치 우크라이나 정권의 손에 의해 우리나라와 전쟁을 벌여온 자들이 자행해온 시도 중 하나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발언도 이어졌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반격에 완전히 실패했고 주도권은 러시아에 있다"면서 우크라이나의 추가 징집이 '히틀러 청년단 창설'과 유사하다고 비판했다. 푸틴은 또 테러 발생 이전부터 관련 정보를 입수하고 러시아에 경고했던 미국에 대해서도 비난의 날을 세웠다. 미국이 "이번 테러는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없고 IS가 저지른 것"이라는 주장을 다른 국가에 주입하려 한다는 얘기다.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 국립도서관 앞에 마련된 추모장소에 한 남성이 꽃을 놓고 있다. EPA=연합뉴스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러시아 국립도서관 앞에 마련된 추모장소에 한 남성이 꽃을 놓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 측의 이런 주장에 대해 미국 백악관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이번 공격은 전적으로 IS 책임"이라며 또 한 번 반박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이날 온라인 브리핑에서 "이번 공격은 IS가 실행했고 우크라이나와 어떤 연결도 없다"면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비난할 방법을 찾는 것은 놀랍지 않다"고 비판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시 테러 직후 연설을 통해 "크렘린궁 지도자는 20년 동안 테러를 저질러왔음에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본다"고 비꼰 바 있다.

푸틴이 이슬람 무장단체의 소행임을 인정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관련된 증거를 찾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테러 세력으로 몰아가려고 했으나, 키이우가 공격의 배후에 있다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고 IS가 자신의 소행임을 계속 주장하자 이를 인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를 계속 언급하는 것은 이번 테러를 전쟁 확장의 구실로 삼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러시아 보안·정보 당국에 비난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 또한 있다.

곳곳 '폭탄 설치' 허위 신고...반이민 정서 우려도

모스크바 테러 용의자 중 한 명인 아민촌 이슬로모프. 타스통신=연합뉴스

모스크바 테러 용의자 중 한 명인 아민촌 이슬로모프. 타스통신=연합뉴스

테러 용의자로 구금된 이들이 중앙아시아 국가 타지키스탄 국적자들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러시아 내 '반이민 정서'가 커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테러로 인해 러시아 무슬림 소수민족이 탄압받을 위험이 커졌다"며 우려했다. 더불어 오랜 동맹 관계인 타지키스탄과의 관계에도 균일이 일 것으로 보인다. 타지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푸틴이 배후를 철저히 색출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중앙아시아 국가 키르기스스탄 출신 15세 소년 이슬람 할릴로프가 테러 현장에서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한 것이 알려지며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테러 당일 공연장 외투 보관소에서 아르바이트 중이던 그는 비명을 지르며 뛰는 사람들을 안전한 건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안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러시아 곳곳에서는 쇼핑몰 등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허위 신고가 들어와 사람들이 대피하는 등 '테러 후유증'이 잇따르고 있다. 관영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모스크바 북동부 고로드 쇼핑센터에서 폭탄 설치 신고가 들어와 약 350명이 건물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일었다. 이밖에 다른 대중시설에서도 비슷한 신고가 이어져 혼란이 지속하는 모습이다. 이에 러시아 하원은 대테러 보안이 필요한 시설에 민간 보안업체가 무장하고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법률 개정을 추진 중이다.

지난 22일 모스크바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발생한 테러로 현재까지 130명 넘게 사망하고 180여 명이 다쳤다. 지난 25일에는 용의자 3명이 추가로 구금됐다. 1명은 타지키스탄, 2명은 러시아 국적자로 이번 테러와 관련해 러시아인이 용의자로 붙잡힌 것은 처음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있는 IS의 보복 예고 포스터. 중동미디어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있는 IS의 보복 예고 포스터. 중동미디어연구소 홈페이지 캡처

한편 IS가 러시아에 보복을 암시하는 내용의 포스터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퍼지고 있다. 이 포스터에는 복면을 쓴 남자가 칼을 들고 있는 이미지와 함께 '푸틴을 포함해 모든 잔인한 러시아인에 대한 위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또 "인질로 잡힌 우리 형제들의 원수를 갚을 기회가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고문당하는 영상을 내보내 수천 명 형제들의 피에 대한 갈증만 커졌다"는 등의 내용도 담겼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 여자들과 함께 모두 학살될 것"이라고도 쓰여있지만, '당신'이 푸틴을 암시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크렘린궁 측은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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