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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 논설위원이 간다

"트럼프 잡기 위해 장녀, 사위, 장남에 모두 손편지 보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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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논설위원

김현기 논설위원

2017년 1월 23일 미국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취임 사흘 만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철수하는 행정명령에 사인했다.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도 무력화했다. 송유관 건설사업 재추진도 선언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고, 반이민 행정명령도 냈다. 취임 100일 동안 낸 행정명령만 무려 30개.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착수, 주한미군 철수 검토 등 쇼킹한 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금 미국은 트럼프에 다시 환호한다. 왜 그럴까.

전문가 분석을 종합하면 그 저변에는 ▶고물가(바이든 정부 출범 후 20% 상승) ▶우크라이나에 미 국민 세금 과다 지원 ▶이민자 급증(트럼프 1기 대비 3배)에 대한 3가지 불만이 깔려있다. 이를 트럼프는 교묘히 '분노'로 전환시킨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현재 걸려있는 4개 재판에서 모두 유죄가 될 경우 최대 717년 형량을 받고 선거 전에도 감옥에 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미 헌법에는 범법자의 대통령 취임을 금지하는 규정이 없다. 교도소에서 취임식을 하거나 트럼프가 자신을 '셀프 사면'하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우리는 트럼프에 대해 "입만 열면 뻥"이라 희화화하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트럼프만큼 자신이 뱉은 말을 잘 실행한 대통령도 드물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런 트럼프를 당시 워싱턴 일선에서 생생하게 마주했던 안호영 주미대사(현 경남대 석좌교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작 안 전 대사는 '트럼프 2기'의 가능성에 신중했다. "1992년 미 대선 당시 주미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있을 때 아버지 부시가 된다고 누구나 생각했는데 빌 클린턴이 됐고, 2016년 주미대사로 있을 때 누구나 힐러리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트럼프가 돼 두 번이나 예측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1기 안호영 전 주미대사의 조언

첫 한미정상회담 모두발언 때 트럼프 돌연 "FTA 재협상 중"
시작도 안 한 재협상을 하고 있다고...예측 불가능의 지도자
트럼프-푸틴 만나도 기록 안 남겨...미-러 관계 심히 우려돼
뚜껑 열릴 때까진 눈에 띄지 않게 트럼프 주변다지기 나서야

내가 겪은 트럼프

트럼프 1기 정부 출범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뭐였나.
선거 기간 중 트럼프의 발언 등으로 미뤄 한미FTA에 손을 대려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트럼프 취임 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따로 만나 충분히 그 부당성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고 한 달반 만에 워싱턴을 찾았을 때였다. 2017년 6월 30일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첫 한미정상회담을 시작하기 전 기자들이 들어온 가운데 양국 정상이 한마디씩 모두발언을 하는데 갑자기 트럼프가 '한국과 미국 정부가 한·미 FTA 개정 협상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서프라이즈 중의 서프라이즈였다. 아니 시작도 안 한 협상을 하고 있다고 하다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전날 만찬에서도 트럼프는 문 대통령을 앞에 두고 계속 윌버 로스 상무부 장관에게 철강·자동차 등 한국과의 통상 사안을 문제 삼고 이에 로스 장관이 거들었다. 하여간 예측이 어려운 대통령이었다.    
2017년 6월3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이미 시작했다고 발언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017년 6월30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한미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이미 시작했다고 발언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트럼프 당선 전, 그리고 당선 후 어떻게 정권 핵심들에 접근했나. 
대선 1년 전부터 고민이었다. 공화당의 기존 정치인과 전직 관료에 더해 밑져야 본전이라고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뿐 아니라 사위 쿠슈너, 장남 트럼프 주니어에게도 손편지를 써  보냈다. 본전 이상은 건진 게 모두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적어도 입력은 됐다는 이야기였다. 실제 쿠슈너는 취임 전 내게 초대 국가안보보좌관이 된 마이클 플린까지 소개해줬다.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플린을 만난 장면이 CNN 등 미 언론에 생방송으로 나가면서 워싱턴의 다른 주미대사들로부터 '어떻게 플린을 만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물론 영업비밀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해 줄 수 없었지만. (웃음)  
2016년 첫 당선 때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또 미국인은 트럼프에 환호하나. 
2011년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을 기억하나. 1% 금융자본에 맞선 99%의 싸움이라며 경제 불평등 해소를 주장한 사회운동이었다. 그때 유력 언론들은 '조만간 이게 정치운동이 되면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라 했다. 그게 트럼프로 현실화된 것이다. 기존 정치인들은 불평등의 원인과 해법을 어렵게 이야기하나 트럼프는 콕 집어서 '중국이 저렇게 싸구려 물건을 자꾸 보내니 그런 거야. 그러니 화끈하게 관세를 때려야 해'라며 머리에 쏙 들어오게 외쳤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2기의 한반도  

트럼프 2기의 정부정책 과제를 집대성한 '프로젝트 2025' 보고서의 국방 분야 집필자 크리스토퍼 밀러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여전히 2만8500명의 주한미군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한지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했다. 만약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한다면 주한미군 철수가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보고서에는 (인터뷰 발언과는) 다른 긍정적 측면도 많다. 가령 가장 앞에는 이렇게 썼다. '미국 안보에 가장 위협은 중국이다. 그런데 안보상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국가가 한국과 일본이다'.  보고서는 또 '미국 군함이 너무 부족하다. 최소 355척은 건조를 해야 한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드니 이제 동맹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돼 있다. 조선하면 한국 아닌가. 인터뷰에서도 밀러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통해 미 방위산업에 문제가 많다는 게 드러났다. 이를 재건해야 한다. 재건 과정에서 미국이 꼭 협력해야 할 대상은 한국'이라고 못박았다.
안호영 전 주미대사가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안호영 전 주미대사가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하지만 밀러는 인터뷰에서 "북·미 군축협상론에 대해서도 나는 왜 안되느냐(Why not?)이란 의견에 찬성하는 편" "이제 기대가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두고 협상해야 한다”고 했다. 이건 근본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것 아니냐.
밀러가 트럼프 1기 후반에 국방부 장관 대리를 하긴 했지만, 북핵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구나,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면 트럼프 2기 핵심 각료로 거론되는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보좌관의 최근 발언이 떠올랐다. 오브라이언은 분명하게 '북한의 행동을 보면 한국이 왜 핵무장을 하려 하는지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건 옵션이 아니다. 역시 미국의 확장억제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국가안보를 총괄한 경험이 있는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따라서 특정 인사의 발언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트럼프 2기의 미·러, 미·중 관계 전망은.
중국에 대한 강경 자세는 공화당, 민주당이 따로 없다. 걱정되는 건 미·러 관계다. 트럼프 1기 때 내가 가장 우려했던 건 트럼프와 푸틴이 만나는 데 기록을 안 남긴다는 것이다. 진짜 섬찟한 이야기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고 한다. 핵무기를 몇천개씩 지닌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이 만나 이야기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기록이 없다는 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6개월 뒤인 2017년 7월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이야기는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 지 6개월 뒤인 2017년 7월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이야기는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적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한다. 한국 같은 FTA 체결 국가에도 이를 적용할 것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는 것 자체가 한미FTA 위반이다.
트럼프가 언제 그런 상식적 판단을 하던가.
지금 얘기하기는 좀 이르다.  

한국의 트럼프 대응방안은

바이든이 다른 인물로 교체될 가능성은.
미 역사상 재선에 출마한 현직 대통령이 후보에서 이탈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트럼프와 바이든의 맞대결이 될 것이다.
트럼프 2기에 대비해 어떤 조언을 하겠나.
뚜껑을 열 때까지 모른다. 너무 나가면 곤란하다. 지난 8일 헝가리의 오르반 총리는 미국을 가 바이든을 안 만나고 트럼프만 만났다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눈에 띄게 하지 말고 물밑에서 준비하다가 필요할 때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왼쪽 둘째)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 셋째)가 2016년 11월 17일 뉴욕 트럼프타워 자택에서 만났다. 맨 오른쪽은 장녀 이방카, 맨 왼쪽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된 마이클 플린.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왼쪽 둘째)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 셋째)가 2016년 11월 17일 뉴욕 트럼프타워 자택에서 만났다. 맨 오른쪽은 장녀 이방카, 맨 왼쪽은 국가안보보좌관에 내정된 마이클 플린.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 당선 직후 트럼프타워를 방문했던 일본 아베 총리처럼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건가.
물론 만나서 관계가 나빠지는 경우보다 좋아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아베가 트럼프타워를 가는 걸 보면서 난 좀 일본이 이악스럽게 일을 하는구나. 국가 이미지에 큰 도움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응'을 위해 필요한 점은.
일단 탁월한 현지 사령관(주미대사)을 믿어야 한다. 국내에선 '일본은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데 우린 뭐하냐'고 지적하는데, 우리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물밑에서 뛰고 있다고 믿는다. 주미 일본대사관이 미 로비회사 25곳을 쓰는데 우리는 5곳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안 되겠다 싶으면 조현동 대사 스스로 건의할 것이다. 일단은 믿고 성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