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간 245건 정책 지도한 시진핑의 만기친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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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 10월 17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3회 일대일로 정상회담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023년 10월 17일 베이징에서 열린 제3회 일대일로 정상회담에 참석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이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한 사람이 가진 권력의 크기로 따질 때 세계 최고의 권력자는 누구일까. 국가가 가진 힘으로 본다면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세계 최대의 경제력과 군사력, 소프트파워를 가진 나라의 지도자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은 미국 특유의 정치 시스템에 철저히 갇혀서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의회가 가진 권력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보다 막강하다.

국가의 힘과 비교해 지도자 개인의 상대적 힘이 막강한 이는 단연 북한 김정은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라는 국가의 위상이 보잘것없다. 국가의 힘과 지도자의 권력 모두 막강한 곳으로 치자면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 그중에서도 시진핑의 파워가 최강이라고 할 것이다. 덩샤오핑이 설계한 공산당 지도부의 집단지도체제는 시진핑에 의해 1인 독재체제로 완전히 탈바꿈됐다.

최근 전 세계 신흥국과 정치·경제 체제전환 국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독일 싱크탱크인 베르텔스만 재단이 19일 발표한 '베르텔스만 혁신지수'(BTI)에서다. 이에 따르면 신흥국과 정치·경제 체제전환 국가에 속하는 137개국 가운데 절반 넘는 74곳이 독재국가로 진단됐다. 재단은 "지난 20년 동안 신흥·체제전환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질은 꾸준히 악화해 왔다"고 평가했다. 재단이 2022년 내놓은 조사에선 70개국이 독재국가로 꼽혔다.

이번에 발표한 민주주의 지표에서 중국과 러시아·북한·벨라루스·이란 등은 '강경 독재' 국가로 지목됐다. 미얀마·시리아·리비아·예멘 등은 민주주의가 '붕괴한 상태'라고 평가했다. 재단은 "137개국 가운데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가에서 조사를 시작한 이래 정치참여 기회가 가장 적은 수준"이라며 "방글라데시와 모잠비크, 튀르키예 등에서 권위주의 통치가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잠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공고한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다. 재단은 "발트해 연안 국가들과 대만, 한국, 코스타리카, 칠레, 우루과이는 혁신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조직하는지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정치·경제·거버넌스 지표를 합산한 혁신지수는 한국이 8.56으로 조사대상 가운데 10번째였다. 에스토니아(9.52), 대만(9.51), 리투아니아(9.29)가 1∼3위를 차지했다. 베르텔스만 재단은 전세계 대학·싱크탱크와 함께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137개 국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거버넌스의 질을 분석해 2년마다 발표한다. 북미와 서부·중부 유럽 등지의 소위 선진국은 조사대상에서 제외한다.

보통 독재국가로 분류되는 나라의 지도자들은 어버이나 선지자의 이미지로 포장된다. 미국 매체인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집권 이후 9년 동안 250차례 가까이 정책 방향성을 제시하며 중국의 거의 모든 분야를 혼자서 이끌었다는 분석을 내놨다. 중국 비평가로 잘 알려진 ‘리선생’의 X(구 트위터) 계정이 밝힌 시진핑의 정책 방향 제시 건수 집계를 보도했다.

통계가 기반을 둔 자료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신화통신과 인민일보 기사다. 2015년 11월 ‘주식시장의 미래 발전 방향 제시’를 시작으로 이달 중순 ‘신품질 생산력 발전을 막는 장애물 제거를 위한 방향 제시’까지 시진핑의 방향 제시 보도는 9년간 총 245건이었다. 시진핑이 국가주석에 오른 것은 2013년 3월이었는데 정책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관영 언론 보도는 2015년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독재적 권력을 공고히 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진핑의 지도력은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인공지능(AI)과 항공우주 기술 같은 첨단과학 분야를 비롯해 코로나19 방역, 금융, 교육, 문화 예술은 물론 고고학 분야에까지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또 세계 2위 대국의 지도자답게 중국은 물론 전 세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이 추진하는 세계적 프로젝트인 일대일로를 비롯해 아프리카의 전염병 퇴치, 아시아·태평양 지역 발전, 생물 다양성, 기후변화 대응, 세계 평화 유지 등 외교 분야와 글로벌 현안에 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시진핑은 신조어 장인이기도 했다. 그의 공산당 총서기 3연임이 확정된 2022년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 개회 연설에서는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중국식 현대화’, ‘전과정 민주주의’, ‘새로운 발전 구도 구축’ 등 이념적 색채가 강한 정치 신조어를 쏟아냈다. 지난해 9월 동북 지역 개발과 관련한 모임에서는 ‘신품질 생산력(新質生產力)’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달 초 제1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회의에서는 ‘신품질 전투력(新質戰鬥力)’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RFA는 시진핑의 이런 선지자적 활약상을 지켜보는 중화권 네티즌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를 보좌하는 참모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의 국가 지도자가 다양한 분야의 세부적인 곳까지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비판이다. 한 네티즌은 “목록을 읽는 데만 10분 이상 걸리겠다. 방향을 제시하느라 바빴겠다”고 꼬집었다. 해당 기사엔 “곧 사각지대 없이 360도로 방향을 제시할 것”이라는 댓글도 보였다.

재미 시사평론가 차이선쿤(蔡慎坤)은 X에 “시진핑은 지난 9년 동안 중국과 세계에 245차례나 방향을 제시했고, 지난 10년 동안 140권의 책을 출간했다”며 “이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10년 동안 최소 500차례 더 방향을 제시하고, 300권 이상의 책을 더 출간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시진핑이 제시한 방향이 너무 많아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아무도 모르고 그 자신도 깊은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고도 했다.

재미 역사학자인 쑹융이(宋永毅) 교수는 “이는 중국이 극단적인 정치 코미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며 “245개 분야에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은 중국 정치가 극도의 어리석음, 코미디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음을 말한다”고 평가했다. 시 주석이 북한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교시’ 수준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이나랩 이충형 특임기자(중국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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