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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재의 사람사진

'바티칸의 김대건' 세운 한진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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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권혁재 기자 중앙일보 사진전문기자

 '타고 노는' 조각 본 적 있나요…“서 있는 사람들 모두 오세요”

권혁재의 사람사진/ 한진섭 조각가

권혁재의 사람사진/ 한진섭 조각가

서울 강동구 강동허브천문공원에서 돌 조각 작품을 보고 놀란 적 있다.
놀란 건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작품에 앉거나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조각 작품을 만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지 않는가.
행여 사람이 만질까 하여 작품엔 펜스를 쳐 접근금지까지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앉고 타고 하니 딴 세상에 온 듯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낯설지만, 절로 친근감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둘러보니 조각 작품은 오토바이를 탄 소, 돼지 가족, 송아지 모자,
담장 너머 세상을 보는 소녀, 의자 등 모두 25점이었다.
모두 자연에 자연스럽게 자연처럼 설치된 터였다.

담장을 넘어 세상을 보는 소녀를 위해 자신의 등을 받쳐주는 포즈를 취한 한진섭 조각가. 어쩌면 그의 조각 정신은 여기서 비롯되었을 터다.

담장을 넘어 세상을 보는 소녀를 위해 자신의 등을 받쳐주는 포즈를 취한 한진섭 조각가. 어쩌면 그의 조각 정신은 여기서 비롯되었을 터다.

작품을 만든 한진섭 조각가에게 사람이 앉고 타게끔 한 이유를 물었다.
“조각이 생활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떨까 하고 시작했습니다.
사실 시작하긴 전엔 작품 가격이 낮은 거로 인식될까봐 염려스러웠죠.
제게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 기우였죠.”

비워 사람이 와서 앉게끔 만든 한진섭 조각가, 그의 넉넉한 웃음에도 비움이 담겨 있다.

비워 사람이 와서 앉게끔 만든 한진섭 조각가, 그의 넉넉한 웃음에도 비움이 담겨 있다.

실제 소, 오토바이 조각상을 타는 사람의 표정이 환하디 환했다.
이를 두고 그는 “물질을 비워야 채울 수 있듯,
비우니 사람이 와서 앉더라고요.”라고 했다.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비우니 새 채움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의자로 앉게끔 만든 작품엔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또한 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이물질이 있으면 못 앉으니 이물질이 빠져나가게끔 구멍을 냈죠.
방귀도 빠져나가게요, 하하”

2023년 9월 16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 벽감에 설치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 한진섭 조각가는 이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2023년 9월 16일(현지시각)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 벽감에 설치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 한진섭 조각가는 이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9월 로마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에 김대건 신부 성상이 세워졌다.
550년 동안 빈 채로 있던 대성전 우측 외벽 벽감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채 두 팔을 벌린 3.77m 높이 조각상이 자리를 잡은 게다.
이 성상이 바로 한진섭 조각가의 작품이다.

그는 이 성상을 만들게 된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어쩌면 조각 작품에 사람이 드나들게 한 데서 기적은 비롯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