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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발레리나vs푸틴 꼭두각시…내한취소 된 자하로바 누구

중앙일보

입력

내한이 취소된 발레 공연, '모댄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가브리엘 샤넬로 출연하는 작품이다. 출처 인아츠프로덕션

내한이 취소된 발레 공연, '모댄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가브리엘 샤넬로 출연하는 작품이다. 출처 인아츠프로덕션

"그와 같은 발레리나는 과거에도 없었으며, 현재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생 로랑(1936~2008)이 러시아 무용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45)를 두고 한 말이다. "최고로 정교하고 섬세한 무용수"(뉴욕타임스, 2014년 '백조의 호수' 리뷰) "타고난 신체조건으로 무대를 휘어잡는 마력의 소유자"(가디언, 2019년 '모댄스' 리뷰) 등의 찬사는, 자하로바에게 새롭지 않다. 그런 그의 4월 내한 공연을 기다리던 발레 팬들은 지난주, 취소 통보 문자를 받았다. 가디언이 2019년 극찬했던 바로 그 공연, '모댄스'다. 발레에도 조예가 깊었던 전설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일대기로, 장당 20만원을 호가하는 티켓은 절찬 판매 중이었다.

가브리엘 샤넬. 블랙과 진주를 사랑했다. [중앙포토]

가브리엘 샤넬. 블랙과 진주를 사랑했다. [중앙포토]

문제는, 자하로바의 또다른 수식어, "친러" "친 (블라디미르) 푸틴" 때문이다. 자하로바는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키이우에서 10살에 발레를 처음 시작했다. 이후 발레 콩쿠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 학교인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러시아를 대표하는 발레 무용수가 됐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카르멘'으로 선 무대. AFP,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홈페이지

스베틀라나 자하로바가 '카르멘'으로 선 무대. AFP,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홈페이지

푸틴 대통령에게 훈장을 다수 수여 받고, 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소속 연방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에게 '인민 무용수'라는 칭호를 내린 이 역시 푸틴 대통령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지난 18일 러시아 대통령으로 다섯번째 당선이 확실히 된 직후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지난 18일 러시아 대통령으로 다섯번째 당선이 확실히 된 직후 사진이다 AFP=연합뉴스

자하로바 역시 적극적으로 친푸틴 활동에 동참했다. 2014년 푸틴 대통령의 첫 우크라이나 침공과 크림반도 합병 당시, 찬성 서명을 한 예술가들 중 한 명이 자하로바다.

이때문에 주한우크라이나대사관은 지난달 자하로바의 이번 내한 공연을 두고 지난달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침략국의 예술가 공연을 보여주는 것은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을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고통을 경시하는 것"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가브리엘 샤넬을 연기한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인아츠프로덕션

가브리엘 샤넬을 연기한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인아츠프로덕션

한·러 관계도 울퉁불퉁하다. 지난해 말 서울에 부임한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가 했던 "한국은 비우호국 중에선 가장 우호적 국가"라는 발언도 논란을 낳았다. 외교사절이 주재국에 대해 평가를 하는 발언 자체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주한 외교대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 3일 러시아 외무부(외교부) 마리야 자하로바 대변인이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편향적"이라고 비난했다. 이 대변인 이름도 공교롭게 자하로바다. 한국 외교부는 바로 지노비예프 대사를 청사로 초치, 엄중 항의했다. 정상 국가 사이에선 타국 지도자에 대해 정부 일개 부처의 대변인이 평가를 하는 것이 결례다.

이런 분위기에서 '친 푸틴' 예술가의 대표주자 격인 자하로바의 공연이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장 중 한 곳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건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커졌다.

2018년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에 객원무용수로 출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 기자회견 중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사진 세종문화회관]

2018년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에 객원무용수로 출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 기자회견 중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사진 세종문화회관]

공연 기획사 인아츠프로덕션 측은 15일 예매자들에게 보낸 문자에서 "팬데믹 이전부터 기획해 오랜 기간 준비하며 여러 상황을 고려해 왔다"면서도 "최근 아티스트와 관객의 안전에 대한 우려 및 예술의전당의 요청으로 취소를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기획사 관계자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더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없다"고 말을 아꼈다.

이에 주한러시아대사관은 "문화예술 분야 협력이 정치적 게임의 인질이 돼선 안 된다"며 "이번 공연을 간절히 기다렸으나 위대한 예술을 접하고 (중략) 공연을 볼 기회를 놓쳐버린 한국 관객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표한다"고 주장하는 입장문을 냈다.

국내 무용계의 분위기도 엇갈린다. 익명을 요청한 무용계 교수는 통화에서 "공연 내용이 정치적 메시지를 띤 것이 아닌 데다, 자하로바라는 무용수의 무대를 볼 기회가 국내엔 적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말했다. 반면 다른 현역 무용수는 "우크라이나 무용수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면 이번 공연은 안타깝지만, 취소가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발레 무용수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두 번 수상했다. 사진 브누아 드 라 당스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발레 무용수 최고의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두 번 수상했다. 사진 브누아 드 라 당스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자하로바의 친푸틴 성향에 대해선 "북한과 같은 독재 국가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거역할 수 없는 것처럼,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란 옹호 입장도 물론 없지는 않다.

하지만 국제 무용계에선 푸틴에 적극적으로 동조해온 자하로바에 대한 부정적 평가 경향이 선명하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안무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지난 17일 자하로바 사진을 게재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출신 세계적 안무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1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푸틴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으며 미소 짓는 자하로바다. 출처 인스타그램

우크라이나 출신 세계적 안무가 알렉세이 라트만스키가 18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 푸틴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으며 미소 짓는 자하로바다. 출처 인스타그램

1979년생인 자하로바의 이번 무대를 두고 "나이를 생각하면 국내 마지막 무대가 될 수도 있다"(인아츠프로덕션)는 말도 나왔지만 정작 자하로바 본인은 2018년 내한 공연을 앞둔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무용수에게 나이는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삶의 매 순간 경험이 도움이 되며, 관객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좋고 은퇴는 생각해본 적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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