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현실정치 모두 아우른 보수주의 역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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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호 24면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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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
에드먼드 포셋 지음
장경덕 옮김
글항아리

영국의 정치전문 언론인인 지은이는 2014년(한국판은 2022년) 내놓은 『자유주의』(부제 ‘어느 사상의 일생’)에 이어 보수주의를 다룬 이 저서(부제 ‘전통을 위한 싸움’)로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서구 현실정치의 사상적 계보를 추적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보수주의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뒤이은 나폴레옹전쟁에 따른 혼란과 고통, 범죄적 무절제의 원인을 따져보는 과정에서 태동했다. 원류로는 프랑스 동남부 사부아(공국에서 1860년 프랑스령이 됨) 출신의 조제프 드 메스트르(1753~1821)와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에드먼드 버크(1729~1797)라는 비주류 학자가 꼽힌다.

두 사람 모두 자유에 대한 오해를 문제의 근원으로 여겼다. 버크는 사람들이 일단 관습과 양식에서 벗어나 제약을 받지 않게 되면 가장 어리석게 행동하면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봤다. 버크는 영국·미국 보수주의의 균형감각·개방성·온건함의 원천이 됐다. 반계몽주의자이자 전제군주제 옹호론자인 메스트르는 사람들이 종교와 세속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을 모든 무질서의 원인으로 여겼다. 메스트르는 우파 권위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줬다.

이달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에 지지자들이 모여든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이달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에 지지자들이 모여든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지은이는 사상 수준에 머물던 보수주의가 현실정치에 진입한 시기를 19세기 중반으로 본다. 더 자유로운 시장과 이동 가능한 노동, 돈의 힘으로 상징되는 근대자본주의를 끌어안은 자유주의가 개방과 변화를 주도하며 득세하자 보수주의는 이에 맞서 사회적 통일성과 확실성·안정성을 추구했다.

혁명과 변화 대신 전통과 안정을 추구한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부와 재산의 힘을 대변하는 우파를 끌어들여 세력을 키웠다. 이를 통해 부유층의 후원, 제도적 지원, 유권자 기반이라는 우파의 이점을 활용하면서 20세기가 되자 선거에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내일도 오늘 같기’를 바라는 국가기관과 법·종교·군대·대학 등과도 연대했다.

보수주의는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와 타협하면서 정치적 지배력을 얻고 근대를 지배하게 됐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특히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는 1845년 이후 서구에서 정치적 정통파가 되면서 20세기 서구 정치를 지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영국에선 1895~2020년의 126년 중 81년 동안 보수 토리당이 단독 또는 연정 다수당으로 통치했다. 프랑스는 제5공화국 60여 년 동안 39년간 우파 대통령이 집권했다. 좌파는 20년간 권력을 쥐었다. 독일은 1949년 연방공화국(서독) 수립 이후 72년 중 51년간 우파 기독교민주당에서 총리가 나왔다. 미국은 조금 양상이 다르다. 지난 120여년 동안 31차례 대선에서 보수 성향이 더 강한 공화당이 17차례, 민주당이 14차례 승리했다. 상원은 공화당이 54년, 민주당이 68년간 지배했다. 하원은 각각 52년과 70년이었다.

지은이는 자유민주주의는 재산권과 민주주의가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잘 작동했다고 평가한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경제학자·정치철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효율과 전통주의·보수주의 이론가인 영국 철학자 마이클 오크숏의 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조화를 이룬 결과라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서구의 중도우파 정당들이 1980년대 이후 점진주의와 시장원리주의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좌우 유권자 모두의 불만을 산 것이 보수주의의 위기를 불렀다고 강조한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당내 파벌싸움 속에 자리에서 밀려났고,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는 보수주의 사전에서 거론도 되지 못할 정도로 저평가를 받았다.

이런 상황은 2010년대 이후 비자유주의적 강경우파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피즘이 대표적 사례다. 독일에선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조용히 대중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중도우파가 오랜 정치적 성공에 취해 대중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틈새를 강경우파가 파고든 셈이다. 보수주의가 이런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개별 국가의 내부정치뿐 아니라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 과제다. 원제 Conservatism: The Fight for a Tradition.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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