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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쉬었냐”는 말은 참아주시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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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여성국 기자 중앙일보 기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여성국 IT산업부 기자

“그동안 푹 쉬었지? 앞으로 더 열심히 해.” 육아휴직을 마치고 온 직원에게 상사가 건넨 이 말은 덕담일까 악담일까. 덕담으로 듣기엔 불편하고 악담으로 듣기엔 모호한가. 육아를 휴식으로 여기는, 저출산 시대의 ‘악마의 디테일’이 녹아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최근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한 또래 직장인 친구 A(남)는 부서장으로부터, B(여)는 임원으로부터 이같은 말을 들었다며 ‘복직자 성토대회’를 열었다. 공교롭게 A와 B의 상사는 모두 50대 남성이었다. A·B에 따르면 이들의 아내는 각각 공무원과 전업주부로 커리어 대신 육아와 돌봄을 택해 남편의 사회적 성공을 도운 것처럼 보였다.

지난해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 중구의 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워킹맘&대디 현장멘토단 발대식에 참석한 모습. [뉴스1]

지난해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서울 중구의 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워킹맘&대디 현장멘토단 발대식에 참석한 모습. [뉴스1]

남자 선배들이 육아휴직을 떠나는 모습을 보고 휴직을 신청한 A는 “팀이 바쁜 시기 하필 지금 써야겠냐. 애가 학교 갈 때 쓰면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 A는 “예상과 다르게 육아휴직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고백한다. 육아를 분담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뒤에 지친 회사 업무와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고. 하지만 육아의 즐거움은 첫 달도 아닌 첫 주까지였다. A는 “종일 육아를 하며 회사에서의 커피 한 잔, 점심시간의 여유, 저녁 회식자리까지 그리웠다”고 했다. 지난해말 보건복지부가 개최한 육아휴직자 간담회에 참석한 아빠들도 A처럼 육아를 휴식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인 B는 어땠을까. 임원으로 부터 “푹 쉬었냐”는 말을 들으니 ‘고과에 불이익이 생기는 건 아닐까’ 싶었다고 했다. B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 ‘만약 누군가 어쩔 수 없이 낮은 고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게 내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는 얘기다. 현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임원의 말 한마디에 괜한 신경이 쓰인다.

“잘 쉬었냐”고 묻는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려볼까. ‘나 때는 남자 육아휴직은 꿈도 못 꾸고, 여자가 육아휴직을 쓰면 퇴사를 해야 했는데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회사 정도면 감사하게 다녀야지. 별것이 다 불편하네’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좋은 세상’의 합계출산율은 0.7명마저 위태롭다. 기업과 정부는 이를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달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부부 모두의 육아휴직 의무화’를 꼽았다.

효과적인 정책이 나오고, 그 정책이 현실에서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과 기업 문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 하는 위기의 저출산 시대에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한 직원에게 “푹 쉬었냐. 잘 쉬었냐”는 말은 부디 참아주시길. “자네 덕분에 기업도 국가도 지속가능하게 됐어. 출산에 육아까지 정말 고생했네”라는 말은 못 해주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