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제환경 변화에 탈고립 동분서주|남북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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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통일방침」새로 마련>
금년도 북한의 대남 정책은「일관성」과「변화」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추진됐다고 볼 수 있다.
즉 과거와 같은 전략이 유지되면서도 과거와는 다른 모습도 보여준 한해였다.
북한은 내외정세를 감안해 결정된 정책을 나름대로 치밀하게 펼쳤으나 기존방침과 변화하는 현실의 틈 사이에서 이를「조율」하는데 애를 먹은 흔적도 보였다.
북한이 김일성의 신년사부터 12월 중순에 있었던 제3차 고위급회담에 이르기까지 대남 정책에서 보여준 일관성은 통일전선형성·주한미군철수·고려연방제 통일방식 등 기존「고정메뉴」.
반면 북한은 고위당국자간의 회담에 응하는가하면 남북축구·음악회·영화제에 호응하는 등 종전과는 다르게 변모된 자세를 보였다.
북한은 김일성의 신년사를 통해「북남 사이의 자유내왕 및 전면개방」을 주장하면서 비무장지대 남측지역에 있는 콘크리트 장벽을 철거하라고 요구했다.
베를린장벽 붕괴를 의식, 다분히 선전공세 성격을 띤 이 제의에 대해 남측이 초기에 제대로 대응을 못해 북한으로서는 일단 성과를 얻은 것 같다.
북한은 이어 2월 8일 팀스피리트훈련을 이유로 고위급회담 예비회담·체육회담 등 일련의 남북대화를 중단시켰다.
이때까지는 북한이 예정된 수순에 따라 움직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소·한중관계가 구체성을 띠어가면서 진전되어 가는 등 주변정세가 급변하는 것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국내외 상황을 종합점검, 대남 정책의 기본 틀을 새로 마련했다.
김일성이 시정연설을 통해 밝힌「조국통일 5개 방침」이 바로 그것이다.
김은 5개 방침으로 ▲긴장완화와 평화적 환경조성 ▲자유 내왕 및 전면개방 ▲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조성 ▲전 민족적 대화발전 ▲전민족적 통일전선형성을 제시했다.
그후 북한은 이 방침에 의거해 하나하나 구체적인 안을 풀어놓았다.
긴장완화방침에 따라 군축안(5·31)을, 자유내왕 항목으로는 판문점, 북측지역 개방(7·5)을 각각 제시했다.

<유엔 단일의석 제안>
통일에 유리한 국제환경 조성을 위해서는 유엔 단일의석가입을 제안했다. 북한은 특히 전 민족적 대화발전의 일환으로 고위급회담 개최에도 응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대화 중단 선언 4개월 후인 6월 20일 고위급회담 예비회담과 국회회담 예비접촉의 재개를 선언했다.
전민족적 통일전선형성의 실천방안으로는 범민족대회(8·13∼17)를 개최했다.
이렇게 볼 때 이 5개 방침에는 북의 대남 정책에서「변하지 않는 분야」와「변한 분야」가 망라돼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변한 분야」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남북고위당국자 회담을 갖기로 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그 동안 남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위급회담은 피해왔다.
그러나 북한은 미·일·중·소의 남북간 대화요구 압력에다 이 회담 자체를 통일 열기 고조에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번에 고위급 회담에 응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김일성이 남한측 총리를 만나기로 결정한 것은 이에 따른「계산」을 떠나 그 자체가 변화된 모습의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축구대회·음악회·영화제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으며 특히 인적교류에 따른 부담을 일단 접어두었다는 점에서「변한 분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변하지 않은 분야」는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철폐·방북인사석방·범민족대회추진 등을 계속 주장·요구한 점이다.
이같이 북한은 앞서의 5개 방침 토대 위에서 적절한 시기마다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남 정책을 수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한-소 수교발표 등 급변하는 외부환경의 압력이 워낙 거센데다 5개 방침 자체에 내포된「모순성」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같은 예로는 자가당착 적인 상황 속에서도 제3차 고위급회담을 유산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베를린에서 열린 조국통일 범 민족 연합회의에 참석한 재야인사가 구속당한 사건이 벌어지자 북한내부에서는 3차 고위급회담 참석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마리 토끼 쫓는 격>
결국 김일성의 지시로 참석했다는 후문인데 여기에는 일본과의 수교 교섭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종전 같으면 회담을 연기시키고도 남을만한 사안이 발생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데 대해 북한이 큰 부담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7월26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범민족대회 2차 예비회담에 불참한 것도 북한의 고민을 단적으로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당시 북한은「인정하고 싶지 않은」남한 당국자들과 대화를 하기로 합의했으나 그들의 5개 방침에 포함돼있는「전민족적 통일전선 형성」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서울로 내려갈까, 밀까」하다가 결국 사소한 문제로 트집을 잡아 포기해버린 것이다.
이 같은 북한의 부자연스러운 몸짓은「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보겠다」는 데에 기인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금년도 대남 정책은 상반기에는「공세」를 폈다가 하반기에 들어서서는 남한측「공세」에 대응책을 강구해나간 양상을 보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안희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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