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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언론, ‘자유를 향한 여정’의 동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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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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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드디어 파리에 입성하다’. 1815년 3월 20일자 프랑스 일간지 ‘르모니퇴르’ 1면 기사의 제목이었다. 러시아 원정 실패와 라이프치히 전투 패배로 권력을 잃고 엘바섬으로 유배됐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귀환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가 뭍으로 올라왔을 때 르모니퇴르 기사 제목은 ‘역적, 엘바섬을 탈출하다’였다. 그 뒤 나폴레옹이 세를 불리며 북진하자 ‘폭도, 리옹 도착’으로, 정권이 뒤집힐 조짐이 보이자 ‘보나파르트, 파리 인근까지 진격’으로 제목을 달았다. 당시 프랑스 최대 부수 발행 일간지에서 역적이 황제 폐하로 바뀌는 데 22일이 걸렸다.

민중이 만든 정부도, 선출 권력도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지는 못해
언론은 자유주의 체제 안전장치

언론의 비루함이 지적될 때 등장하는 일화다. 비굴·비겁하고 권력 지향적이라고 한다. 힘 빠진 먹잇감은 사납게 물어뜯고, 힘센 자에게는 아부하고 아첨한다고 말한다. 시류에 영합하는 언론은 욕을 먹어 싸다. 그런데 왜 르모니퇴르가 그렇게 됐는지를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나폴레옹 1차 집권기에 84개 프랑스 신문 중 79개가 폐간됐다. 나머지 5개는 관변 매체가 됐다. 나폴레옹의 재집권은 언론사와 기자에게 다시 돌아온 굴종의 시간을 의미했다.

흔히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시민적 자유의 출발점으로 말한다. 그러나 혁명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혁명정부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인민 의지’에 따르지 않는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비판적 언론인이 공안위원회에 끌려갔고, 상당수가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뒤 왕정이 부활했던 때에도,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표현의 자유’는 제한됐다. 프랑스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기 시작한 것은 1830년의 프랑스 ‘7월혁명’ 이후다. 대혁명에서 41년이 걸렸다. 맨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청·백·적의 삼색기를 들고 군중 앞에 선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배경인 7월혁명은 언론·출판 종사자의 시위에서 비롯됐다. 출판의 자유를 금한 국왕 샤를 10세가 7월혁명으로 망명했다. 부르주아 세력이 왕위에 앉힌 루이 필리프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나폴레옹이 복귀한 1815년으로 되돌려 본다. 그는 헌법에 따라 통치하겠다고 약속하며 자유주의자 뱅자맹 콩스탕에게 개정 헌법 초안 작성을 맡겼다. 그 결과물이 ‘제국 헌법 추가 조항’이다. 흔히 ‘뱅자맹 헌법’으로 불리는 이 새 헌법은 발효되지 못했다. 워털루전투 패배로 그의 재집권이 ‘100일 천하’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헬레나 로젠블랫 뉴욕시립대 교수의 책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에 따르면 콩스탕은 개정 헌법 해설서에 제약 없는 권력은 민중의 이름으로 행사되든, 군주의 이름으로 행사되든, 의회의 이름으로 행사되든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콩스탕은 권력이 누구의 손에 있든 상관없이 정부 권한을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했다. 그가 헌법에 넣은 자유주의 체제 보장의 핵심 수단은 사상의 자유,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였다.

콩스탕 등의 자유주의자에게 언론은 ‘안전장치’였다. 시민들이 혁명으로 세웠든, 정당한 투표에 의해 선출됐든 권력에는 늘 남용과 오용의 위험이 따른다.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핵심 수단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다. 토머스 제퍼슨 등에 의해 1791년에 추가된 미국 헌법 조항 열 개 중 첫째가 그래서 이것이다. ‘발언, 출판의 자유나 집회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자유의 위대함을 말했다. 3·1절 기념사에 ‘자유를 향한 위대한 여정’이 거론됐다. ‘여사’를 뺀 ‘김건희 특검법’이라고 말했다고 정부 심의 기관이 제재를 가하고, 대통령 경호원들이 시민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 것은 그 위대한 여정에 어울리지 않는다. 폐하, 각하의 시절은 오래전에 끝났고, 자유주의 수호자를 자임한 대통령이 재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