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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반도체, 방심하다 다 따라잡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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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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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반도체의 성공 비결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스피드, 투자, 국제 정세.

먼저 스피드. 삼성전자의 첫 반도체 공장인 기흥 1공장은 1983년 9월 착공해 6개월 만에 완공됐다. 빨라도 1년 반은 걸린다는 통설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히터를 켜놓고 콘크리트를 말리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동원됐다(『이건희 반도체 전쟁』 중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회고). 기술 채택은 늘 ‘빠르게, 더 빠르게’였다. 남들이 5인치 반도체 웨이퍼를 쓰고 있을 때 6인치를, 8인치가 상용화돼 있을 때 12인치를 개발했다. 이를 위해선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다. 삼성은 D램 가격이 폭락하고 천문학적 적자를 볼 때도 공격적 투자를 결행했다.

일, 미·대만과 반도체 부활 나서
미, 첨단 반도체 직접 생산 가속
국내 위기감·절실함 예전만 못해

그렇다 해도 미·일 반도체협정이 없었다면 후발 주자인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안보·가치 동맹인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힘으로 주저앉혔다. 일본 메모리 반도체의 시장 점유율이 80%로 치솟고 미국 대표기업 인텔이 D램 시장에서 철수하던 무렵이었다. 일본은 결국 생산 원가를 공개하고, 저가 공세를 중단했다. 폭락했던 D램 가격이 뛰기 시작했고, 한국에 기회가 찾아왔다. 미·일 반도체협정이 1986년 7월, 마이크론이 NEC 등 일본 회사를 덤핑으로 제소한 것이 85년 6월, 삼성전자의 기흥 1공장 완공이 84년 3월, 기흥 2공장 준공이 85년 3월이었다. 모든 것이 영화 각본처럼 맞아떨어졌다. 그 뒤 일본은 반도체 제조 시장에서 밀려났고, 한국과 대만이 그 자리를 메웠다.

한국의 3대 성공 요소는 더 이상 한국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인 대만 TSMC가 일본 구마모토현에 새 반도체 공장을 준공했다. ‘365일 24시간 공사’를 2년간 해서 공기를 두 달 이상 앞당겼다. 속도전은 한국의 무기였는데 일본과 대만이 따라 하고 있다. 각국의 투자 지원도 총력전이다. 미국도, 유럽도, 일본도 반도체 투자에 막대한 보조금을 준다. 일본은 TSMC의 구마모토 1, 2공장 투자비의 약 3분의 1(약 10조7000억원)을 지급한다. 하지만 한국은 반도체 투자에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투자유인 효과로 보면 현찰 보조금이 세금 공제보다 한 수 위다. 지금 일본은 반도체 부활에 ‘진심’이다.

국제 정세는 어떨까. 미국이 일본 반도체를 쓰러뜨린 후 지난 30여 년간 설계는 미국이, 생산은 한국(메모리)과 대만(파운드리)이 했다. 이 국제 분업 구도에 금이 가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최첨단 반도체 직접 생산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 정부가 뒤를 받치고, 미국 회사끼리 구매해 주는 ‘팀 아메리카’가 가동 중이다. 마이크론이 최근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인 ‘HBM3E’의 양산을 발표했다. 삼성과 SK하이닉스보다 앞섰다. 그 제품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미국 회사 엔비디아 상품에 장착된다. 파운드리 시장에 뛰어든 인텔은 AI 선두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주문을 받아 최신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했다. 인텔은 순식간에 파운드리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미·일은 반도체 동맹 복원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반도체·첨단기술 분야 협력을 위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토요타·소니 등 8개 일본 회사가 만든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는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반도체 양산 목표 시기를 2027년으로 잡았다. 성공하면 한국·대만에 바짝 따라붙는다. 라피더스는 이 기술 개발을 위해 미국 IBM에 100여 명의 기술진을 파견했다. 마치 2차대전 이후 미국 기업이 일본에 반도체 특허를 공개하고 기술을 전수해 준 것을 연상시킨다. ‘칩4 동맹’(미국·일본·대만·한국)이라더니 한국만 외톨이가 되는 형국이다.

자고 나니 선진국이라고 한다. 반도체를 빼놓고는 그 성취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반도체 기적을 만들어낸 위기감과 절실함이 예전 같지 않다. 정치도, 정부도, 기업도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자만하다가, 방심하다가 다 따라잡히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