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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협운영 파행 넉달「인권업무」기능마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국민 인권옹호·기본권보호에 앞장서온 대한변협(회장 박승서)이 지난 9월 변협인권위소속 변호사들의 박 회장 사퇴요구 이후 대외적인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는 등 기능 마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해동안의 인권침해사건 기록·분석과 고발자료 등을 수록, 국내 인권실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매년 발간해온『인권백서』의 제작을 못하고 있고 각종 인권침해사건에 대한변협의 진상조사와 무료변론·법률구조활동·각종 성명서 발표 등 고유활동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보안사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에 대한 변호인단 구성도 대한변협이 나서지 못하고 종전과 달리 서울·부산지방변호사회 등 지역변호사단체가 나서는 등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기능이 마비된 인권위원회는 인권과 관련된 대한변협의 대외활동을 도맡다시피 한 가장 중요한 기구로 변협의 얼굴이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다만 지난 1일 변협회장이 후임 대법원장 지명과 관련, 『사법부의 신뢰와 독립을 실현시키는데 굳은 의지와 열의를 가진 인사여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내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처럼 변협이 무력화된 것은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기소됐던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에 대한 변론을 박승서 회장이 맡아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인권위소속 변호사들이 박 회장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30명 전원이 인권위원직을 사퇴했기 때문이다.
9월 6일 인권위 임시회의에서 이루어진 전원사퇴는 개별적인 사퇴서 작성 등 문서화하지는 않았으나 만장일치로 사퇴를 결의한 뒤 지금까지 이를 철회하지 않고 인권위활동을 거부해 사실상인권위는 해체된 상태나 다름없다.
박 회장이 사과하는 선에서 가까스로 마무리 지어졌던 사퇴요구 파문은 외형적인 수습과는 달리 심각한 후유증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권위는 다른 위원회와는 달리 매월 한차례씩의 정기회의와 필요할 때마다 임시회의를 열어 활동을 벌여왔으나 사퇴이후에는 전혀 가동이 안되고 있다.
박 회장 등 변협 간부들은 이번 집행부의 임기가 1개월 남짓 남아있어 임기중 인권위 기능회복을 의해 인권위소속 변호사들에게 사퇴의사를 철회해주도록 직·간접으로 수 차례 설득하기도 했으나 인권위 변호사들은 박 회장 사퇴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변협에 참여해 일할 수 없다며 사퇴를 고집하고 있다.
인권위변호사들은『박 회장이 자신의 강 전 치안본부장에 대한 변론으로 인해 변협의 위상을 손상시킨 것으로 깊이 사과한다는 의견을 밝혔으나 근본적인 변협위상의 재정립을 위해서는 박 회장이 사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권위 활동에 참여치 않기로 했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박 회장이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이 같은 인권위의 공전사태는 박 회장이 2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내년 1월말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며 변협정상화는 차기변협회장이 들어서는 내년 2월 이후에나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인권위소속 한 변호사는『인권위가 가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인권백서의 정상발간은 불가능하다』고 밝히고『새 회장이 들어선 이후인 내년 4월쯤에나 책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원로변호사는『인권옹호의 일익을 맡고 있는 변협의 파행운영을 모든 법조인이 함께 부끄러워해야 한다』며『이 같은 불행이 계속될 경우 결국 국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는 만큼 인권위활동이 하루속히 정상화돼야한다』고 말했다. <김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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