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궁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유홍준 교수는 호언장담했다. 그 국토박물관의 최고 소장품으로 궁궐(宮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삼각산 아래에 궁궐이 자리잡은 것은 정도전이 경복궁을 완공한 1395년부터다. 이후 창덕궁.창경궁.경희궁.덕수궁 등 5대 궁궐로 자리잡았지만 그간 숱한 전란과 화재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의 대부분은 불과 1백여년 전 만들어진 것들이다.

흥선대원군이 아들(고종)을 임금자리에 앉히자마자 시작한 사업이 왕궁 복원이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궁궐을 장엄하게 복원함으로써 안동 김씨라는 권세가에 휘둘리던 왕실의 위엄을 되찾는다는 정치적 상징이 담긴 사업이었다. 섭정의 집념이 담겼기에 적지 않은 무리가 따랐다. 그러나 전국의 좋다는 나무와 돌을 모두 끌어모으고, 일류 기술자들을 집중 투입했기에 당대 최고 수준의 문화유산이 집적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집념을 배운 고종이 덕수궁을 중창한 배경도 정치적이다.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1년 만에 끝내면서 덕수궁을 새 거처로 삼았다. 동시에 대한제국을 선포(1897년)하면서 황제의 권위에 맞는 상징적 공간인 황궁(皇宮)으로 만들었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임진왜란 당시 피란갔던 선조가 서울로 돌아와 임시 거처로 삼아 궁으로 승격됐지만 상대적으로 초라한 궁이었다.

고종이 입주하면서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 대부분 건물이 신축됐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의 궁궐을 서둘러 훼손한 데도 정치적 고려가 작용했다. 대원군과 고종이 망해가던 왕조의 위엄을 추스르고자 궁궐을 지었다면, 반대로 일제는 왕조의 흔적을 털어내고자 궁궐을 파괴했다. 경복궁엔 총독부 건물이 들어서고 박람회가 열렸다. 덕수궁은 앞뒤로 도로가 나면서 잘려나가고, 선원전(璿源殿) 터엔 경성제일여고(경기여고)가 들어섰다.

경복궁이 제 모습 찾기에 나선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인 1995년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부터다. 지난주 근정전(勤政殿)이 오랜 보수 끝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성과를 거뒀다. 반면 덕수궁의 일부였던 경기여고 자리엔 새 미국 대사관을 짓기 위한 절차가 진행 중이다. 사전 지표조사에서 유물이 일부 발견됐다고 한다. 전 국토가 박물관인 나라의 궁궐터라 조심스럽다.

오병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