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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의사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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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1. 이번 의사 파업으로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2024년 의대 입학 정원 3058명은 35년 전인 1989년의 입학 정원과 같은 규모라고 한다. 그사이 한국 인구는 4244만 명에서 5175만 명으로 21.9% 증가했는데 의사 배출은 제자리란 것이다. 의대 정원은 1990년대에 3253명까지 늘었지만 2000년 의약분업 파업 사태를 계기로 다시 줄었다. 김대중 정부가 의사들을 달래기 위해 의대 정원을 축소했다. 그래서 2006년 이후 의대 전체 정원이 18년간 3058명으로 묶여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의료 수요가 급증하는 65세 이상 노인층의 규모다. 89년 당시 65세 이상 인구는 205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올해는 993만 명이나 된다. 노인 인구가 5배 느는 동안 의사 양성은 동결해 왔으니 앞으로 큰 문제가 안 생길 수 있을까.

전북의사회 회원들과 의대생들이 22일 전주종합경기장 앞에서 '의대정원증원,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전북의사회 회원들과 의대생들이 22일 전주종합경기장 앞에서 '의대정원증원, 필수의료 패키지' 저지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2.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지난 20일 성명서를 통해 “전공의들이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면서 최저임금 수준의 보수를 받고 있음에도 정부는 이제껏 이를 외면했으면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나 의료 마비가 된다고 한다”고 항변했다. 병원들이 전공의를 착취에 가깝게 부려먹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정부가 의대 정원을 대폭 늘려 가련한 전공의들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건데, 전공의들이 그건 왜 반대하는 건가? 힘들어 죽겠다면서도 인력 지원은 마다하는 모순을 이해해 달라니 참으로 난감하다.

노인 5배 늘어도 의사배출 제자리
병원 밖 민심은 잘 모르는 의사들
의사파업, 윤 정부에 위기이자 기회

3. 의사단체는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한국이 2.6명으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한 편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의 2.6명은 한의사까지 포함한 수치고, 한의사를 제외하면 2.18명이 돼 OECD 최하위로 떨어진다. 의사단체가 평소엔 한의사를 자신들과 동렬로 대우하지도 않으면서, 이럴 땐 슬쩍 동료로 끼워 넣는다.

지난 17일 서울 대한의사협회 대강당에서 열린 의료정원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김택우 비대위원장(가운데)은 "단 한명의 의사라도 이번 사태와 연관해 면허와 관련한 불이익이 가해진다면 의사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행동에 돌입할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고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지난 17일 서울 대한의사협회 대강당에서 열린 의료정원 증원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김택우 비대위원장(가운데)은 "단 한명의 의사라도 이번 사태와 연관해 면허와 관련한 불이익이 가해진다면 의사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행동에 돌입할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고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4. 의사들은 의대생 시절부터 은퇴까지 줄곧 병원에서만 활동하고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병원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미셸 푸코는 병원은 의사가 권력을 행사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대통령ㆍ재벌도 병원에 가면 의사 말에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의사들은 병원 밖 민심에 대해선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다. 최근 의협 전직 간부가 “정부는 의사들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파업에 나선 한 전공의가 “제가 없으면 환자도 없다”는 선언한 것은 국민 여론을 자극하는 오만한 언행이었다. “면허 불이익은 의사에 대한 정면 도전”(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이란 말도 기가 막혔다. 의사가 정부의 상전인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나 ‘낭만닥터 김사부’는 역시 드라마에 불과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22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5. 2000년 의약분업 반대 투쟁이나 2020년 공공의대 설립 반대 파업은 진보 정권과 의사들의 충돌이었다. 그래서 의사들에겐 보수 진영이 우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 정권이 의사들을 압박하는 상황이다. 지금 의사들은 고립무원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의사 정원 이슈를 총선에 써먹으려는 윤석열 대통령이 얄밉긴 하지만 그렇다고 의사 파업을 지지할 순 없다. 의료계 내부에서도 평소 의사와 사이가 나빴던 간호사ㆍ한의사ㆍ치과의사ㆍ약사가 이 시점에서 의사를 편들 리 없다. 심지어 불법 파업의 대명사인 민주노총마저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며 파업 철회를 촉구할 정도다. 의사들은 외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

6. 의사 파업은 윤석열 정부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의사들의 저항을 뚫고 큰 폭의 의사 증원을 관철한다면 정부의 큰 업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파업이 장기화하면 여론의 화살이 정부를 향할 수도 있다. 윤석열 정부가 대책도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파업을 조기 종식할 정교한 시나리오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윤석열 정부의 실력이 드러날 진실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