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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J 동맹 이어 ‘팀 아메리카’…코너 몰리는 한국 파운드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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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새 판 짜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

미국은 ‘금쪽같은 내 인텔’을 싸고돌고, 대만과 일본 반도체 산업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판을 흔들 새 고객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칩4 동맹’(한국·미국·일본·대만) 중 한국이 처한 현실이다.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2위인 삼성전자는 1위 TSMC와 간극을 좁히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2위 수성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급변하는 정세에 맞춘 파운드리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리는(We) 미국에서 더 많은 반도체를 생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리콘을 다시 ‘실리콘밸리’로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이 과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2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IFS) 다이렉트 커넥트’ 행사에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화상으로 참석해 “우리가 모든 종류의 반도체를 만들려는 건 아니지만, 인공지능(AI)에 필수적인 최첨단 칩은 직접 생산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러몬도 장관의 키노트를 시작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 미국의 거물급 테크기업들은 전 세계 반도체 관계자 5만2000명이 참석한 인텔의 첫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행사에서 잇따라 ‘아메리카 원 팀’을 강조했다. 콘퍼런스 자체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공식화하는 자리였던 셈이다.

러몬도 장관은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와의 대담에서도 “인텔은 미국의 챔피언 기업”이라고 치켜세웠다. 또한 ‘우리’라는 단어를 반복하며 서로 같은 팀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겔싱어 역시 공급망 탄력성을 이유로 내세우며 미국에서 반도체를 제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첨단·레거시 파운드리 골고루 육성…국가 반도체 전략 필요”

그는 “현재 전 세계 반도체의 80%를 아시아에서 만들고 있다. 반도체 생산은 특정한 지역·국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10년 내 미국·유럽이 세계 반도체의 50%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이날 인텔이 마이크로소프트(MS)를 1나노급 공정 고객사로 확보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사전 녹화된 영상을 통해 등장한 사티아 나델라 MS CEO는 “MS는 인텔의 18A(1.8나노급) 공정으로 반도체를 생산할 것”이라고 밝혔다. 인텔이 MS 등에서 수주한 금액은 150억 달러(약 19조9000억원)에 달한다. 파운드리 비즈니스에서는 고객 확보가 관건인데, 인텔이 TSMC와 삼성전자보다 앞서 AI 선두를 달리는 MS의 손을 잡은 것이다.

이날 엔비디아는 지난해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65% 급증한 221억 달러(약 29조5000억원)를 달성했다고 밝혔고, 순이익도 월가 예상치를 뛰어넘었다. 반면에 수많은 엔비디아의 도전자들은 퇴각하고 있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삼성도 엔비디아 GPU 물량 일부를 생산하지만 이 회사 첨단 AI 반도체는 TSMC 공정에서 생산되는 만큼 엔비디아의 독주는 삼성전자에 부담이다. 엔비디아·애플 등 대형 고객은 TSMC가 쥐고 있기에, 새로운 AI 반도체 주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삼성 파운드리의 새로운 고객사 확보도 난항을 겪을 수 있다.

칩4의 아시아 3개국 중 일본과 대만은 급격히 가까워지는 중이다. 22일 로이터통신은 최근 2년간 9개 이상의 대만 반도체 회사가 일본에 지사를 설립하거나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도체 사업을 부활시키려는 일본, 미국의 요구로 ‘중국 디커플링(탈동조화)’을 해야 하는 대만, 양국의 필요가 만난 데다 엔저 효과로 반도체 협력이 급물살을 탄다는 것이다.

TSMC는 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 제1 공장을 완공하고 제2 공장은 2027년 완공하는데, TSMC를 따라 대만 반도체 회사도 일본으로 넘어오는 추세다. TSMC는 미국 정부의 권유 및 압박으로 미 애리조나 공장을 짓고 있지만, 정작 해외 생산기지는 일본에 빠르게 마련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일본 정부가 관대한 보조금(최대 50%)을 신속하게 지급하며 인력도 우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TSMC 일본 공장은 12~28나노급의 레거시(비첨단) 공정이지만, 차량용 반도체나 이미지 센서 등 일본 산업의 수요와 맞는 칩을 생산한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국가 차원에서 첨단·레거시 파운드리를 골고루 육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삼성전자는 TSMC와 1, 2나노급 첨단 공정에서 경쟁하고 있는데, AI 기술 보편화와 전기차 보급 등으로 레거시 반도체 시장도 커지고 있는 만큼 이 시장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차량용 반도체 등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는데, 국내는 삼성전자 등이 해당 기술을 보유했음에도 첨단 공정 투자에 밀려 실행을 못 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자동차 산업이 발달한 부·울·경 지역에 차량용 파운드리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는 “첨단 공정은 대만 본토에서 하고, 레거시 공정은 일본에서 하는 건 TSMC의 아주 좋은 전략”이라며 “한국도 군수용 반도체 등 구공정을 포함해 전문 기업을 키우는 종합적인 국가 반도체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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