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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의문사, 반역죄 체포까지…러, 대선 앞두고 공포 정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꼽혔던 알렉세이 나발니가 옥중 돌연사한 가운데, 러시아 당국이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나섰다. 코앞으로 다가온 러시아 대선과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국면에서, 반대 세력에 대한 가차없는 응징을 통해 불만 여론의 싹을 자르려는 러시아 정부의 시도라는 분석이 나왔다.

20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나발니의 친동생인 올레그 나발니가 러시아 내무부의 수배 명단에 두 번째로 올랐다고 보도했다. 내무부 관계자는 경찰이 올레그에 대한 새로운 형사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다면서도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올레그는 이미 수배 명단에 올라있는 상태였다. 그는 2021년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뒤 코로나19 방역 위반 혐의로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으나, 당국은 그가 보호관찰을 따르지 않았다며 수배 명령을 내렸다.

20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세이 나발니 추모 공간에 헌화하는 러시아 여성. AP=연합뉴스

20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세이 나발니 추모 공간에 헌화하는 러시아 여성. AP=연합뉴스

나발니 친동생, 두 번째 수배명단 올라

이번 조치는 나발니가 지난 16일 시베리아 야말로네네츠 자치구 하르프 제3 교도소에서 의문사한 뒤, 유족들이 그의 시신이라도 보여달라고 호소하는 와중에 나왔다.

이날 나발니의 모친 류드밀라 나발나야는 유튜브에 영상을 올려 “푸틴 대통령에게 호소한다”면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알렉세이의 시신을 즉시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21일 타스 통신에 따르면 나발나야는 교도소가 위치한 지역 법원(살레하르트시 법원)에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는 소송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한 심리가 다음 달 4일 열릴 예정이다.

20일(현지시간) 알렉세이 나발니의 어머니 류드밀라 나발나야가 나발니가 죽은 시베리아 교도소를 배경으로 "시신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영상. AP=연합뉴스

20일(현지시간) 알렉세이 나발니의 어머니 류드밀라 나발나야가 나발니가 죽은 시베리아 교도소를 배경으로 "시신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영상. AP=연합뉴스

앞서 나발니의 아내인 율리아 나발나야는 지난 19일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푸틴 대통령이 남편을 살해했다며 반정부 운동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계정은 하루 만에 9만 명 이상의 팔로어를 끌어모았고, 영상 연설은 500만 뷰 이상을 기록하며 큰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해당 계정은 20일 돌연 정지됐다 복구됐다.

당국은 러시아 전역에서 나발니를 추모하는 일반 시민들을 무차별 체포하는 등 강경 대응을 고수하고 있다. 러시아 인권감시단체 OVD인포에 따르면, 지난 18일까지 36개 도시에서 최소 366명이 체포됐다. 이중 일부는 2주 이상 구금형을 선고받았다.

19일(현지시간) 나발니의 부인 율리아 나발나야가 영상 메시지를 통해 크렘린에 맞서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나발니의 부인 율리아 나발나야가 영상 메시지를 통해 크렘린에 맞서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이날 영국 더타임스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인권운동가 블라디미르 오세크킨의 발언을 인용해 “나발니의 사인이 심장에 한순간 강하게 꽂힌 ‘원 펀치 처형’일 것”이라고 보도했다. 러시아 인권단체 ‘굴라구.넷’의 창립자이기도 한 오세크킨은 “나발니가 사망한 교도소 소식통에게 직접 얻은 정보”라면서 “소련 KGB(러시아 연방정보국(FSB)의 전신) 요원들이 쓰는 특유의 수법으로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교도소에는 며칠 전부터 FSB 요원들이 들어와 있었고, 나발니의 죽음은 준비된 특수작전이었다”고 강조했다.

나발니가 숨진지 사흘만에 그의 수감 생활에 관여한 교정당국 간부가 승진한 것도 의혹을 키우고 있다. 러시아 법률정보 웹사이트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지난 19일자로 러시아 연방교정국(FSIN) 제1부국장 발레리 보야리네프를 승진시키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 나발니의 지지자들은 그가 나발니 사망과 관련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스페인서 살해된 조종사…유럽 망명자 공포

유럽 전역의 러시아 망명자들도 공포에 휩싸인 상태다. 개전 직후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러시아 공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가 스페인에서 피살되면서다. 이 사건과 관련해 스페인 경찰은 러시아 정보 당국과 러시아 마피아의 범행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 19일(현지시간) 외신들은 쿠즈미노프가 지난주 스페인의 한 마을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EPA=연합뉴스

지난해 8월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러시아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 19일(현지시간) 외신들은 쿠즈미노프가 지난주 스페인의 한 마을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EPA=연합뉴스

가디언은 “러시아 정부는 지금껏 유럽 전역에서 일련의 암살을 자행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19년 독일 베를린의 한 공원에선 FSB 요원인 바딤 크라시코프가 젤림칸 칸고슈빌리 전 체첸반군 사령관에게 총을 쏴 살해했다.

2018년 영국 솔즈베리에선 전직 러시아 스파이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한 세르게이 스크리팔이 딸 율리아와 함께 화학 무기 ‘노비촉’에 음독된 뒤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당시 영국 정부는 러시아 정찰 총국 소행으로 추정했다. 2006년엔 영국으로 망명한 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가 런던의 한 호텔에서 고농도 방사성물질인 ‘폴로늄-210’이 든 홍차를 마시고 3주 만에 사망했다.

지난 2021년 독일 베를린 법원에서 2019년 체첸 반군 지도자 살인 사건에 관한 평결이 열렸다. 법원은 이날 이 사건을 ″러시아 국가에 의한 테러″로 규정하고, 범인 바딤 크라시코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021년 독일 베를린 법원에서 2019년 체첸 반군 지도자 살인 사건에 관한 평결이 열렸다. 법원은 이날 이 사건을 ″러시아 국가에 의한 테러″로 규정하고, 범인 바딤 크라시코프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로이터=연합뉴스

6만9000원 우크라 기부에 ‘반역죄’ 적용

러시아 보안당국은 ‘반역죄’ 카드도 꺼내들었다. FSB는 20일 우크라이나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러시아와 미국 이중국적자인 크세니아 카바나(33)를 반역 혐의로 체포했다. 혐의가 확정되면 최대 20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지 법률단체는 카바나가 우크라이나 자선단체에 51달러(약 6만9000원)를 기부한 것이 체포 사유라며 부당함을 호소했다.

러시아에서 반역죄로 체포된 미 이중국적자 크세니아 카바나. 카바나 엑스 계정 캡처

러시아에서 반역죄로 체포된 미 이중국적자 크세니아 카바나. 카바나 엑스 계정 캡처

지난해 간첩 혐의로 붙잡힌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의 구금 기간도 다음달 30일까지로 네번째 연장됐다. 지난해 6월 체포한 자유유럽방송(RFE)의 알수 쿠르마세바 기자의 구금 기간도 오는 4월 초까지 연장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 정부가 이처럼 무차별 탄압을 이어가는 것에 대해 “대선(다음달 15~17일)을 앞둔 푸틴 대통령이 탄압 강도를 낮출 것이란 국제 사회의 예상과 달리, 러시아 정부는 더 광범위하고 강한 압박을 예고한 것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3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에반 게르슈코비치.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3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에반 게르슈코비치. 로이터=연합뉴스

나발니의 정치적 동지이자 ‘포스트 나발니’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야권 인사 일리야 야신은 20일 옥중 서신을 통해 “고통과 공포를 참을 수 없을 지경”이라며 “누가 (나발니를) 죽였나. 푸틴이라고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내 목숨 역시 푸틴 손에 달렸지만 독재에 맞서겠다”고 투쟁 의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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