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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과 새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 뒤섞여 문화 융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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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호 20면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
마틴 푸크너 지음
허진 옮김
어크로스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 교수인 지은이는 문화를 크게 봐서 ‘정체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가지 렌즈로 살펴볼 수 있다고 여긴다. 정체성에 무게를 실으면 ‘민족문화’ ‘고유문화’를 외치면서 문화를 그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공동 자산이자 소유물로 여기게 된다. 보편성을 강조하면 문화는 인류 전체의 소유물이며 서로 교류하고 접촉하면서 시너지를 얻는다는 입장으로 이어진다.

전자는 국가와 민족의 전통을 지킨다며 이민자와 이방인을 배척하고, 미심쩍은 과정을 거쳐 외국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본국’으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후자에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경을 가져오고 한문으로 옮긴 당나라 현장법사나 고대 그리스 철학서를 번역한 아랍·페르시아의 학자가 들어간다. 당나라나 사라센제국은 이처럼 먼 나라, 오랜 과거, 이질적인 이방인 공동체에서 영감을 받고 이를 가꾼 결과 역사에 길이 남는 문화를 이뤘다는 게 지은이의 지적이다.

1493년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실린 세계 모습.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우회해 아라비아로 가는 항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사진 어크로스]

1493년 『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실린 세계 모습.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우회해 아라비아로 가는 항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그려져 있다. [사진 어크로스]

물론 그 과정은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과 정복, 지식인과 기술자 납치, 작품과 유물 도둑질, 기술과 지식 도용 등 험난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지은이는 문화에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자신만의 둥지에 안주하면 스스로 한계와 제약에 빠져 표현 형태가 빈약해진다고 일침을 가한다.

K-팝은 이러한 문화의 본질과 저력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지은이는 K-팝이 전 세계에서 그토록 많은 청중에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로 “록·재즈·레게·아프로비트 등이 뒤섞인 스타일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가사에 한국어와 영어가 섞이는 것도 자연스럽다. 뮤직비디오에 딱 맞는 군무는 인도 발리우드 영화에선 흔히 볼 수 있지만 미국에선 신선한 충격이다. 미국 팝과 랩에선 흔한 폭력과 외설이 K-팝에선 없다는 것도 주목거리다.

이러한 K-팝은 이제 해외에서 해외팬들이 직접 창작에 참가하는 프로슈머의 글로벌 보편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K-팝의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전 인류의 문화적 성취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화는 새로운 문화가 자라나는 터전이다. 타문화와의 접촉과 자극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각과 함께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로도 이어질 수 있다. 대항해시대와 서구 제국주의 시대는 양날의 검이었다. 서양은 자신의 문명을 신대륙과 아시아·아프리카에 퍼뜨린 것은 물론, 다른 세계의 문화를 받아들여 자양분으로 삼았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산스크리트어 극, 페르시아어와 아랍어 시, 중국어 소설을 접한 뒤 만년인 1827년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라는 개념을 내놨다.

지은이에 따르면 서양은 이처럼 외부의 다양한 이국 문화를 자극제로 받아들이면서 옛것과 새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조합해 새로운 문화 시대를 열었다. 진취적인 시대정신이 고립된 자급자족의 답답한 전통은 무너뜨린 것이다. 일본에 머물렀던 매개인들을 통해 서양에 소개된 일본의 채색판화 우키요에(浮世畵)와 가무극 노(能), 그리고 중국의 경극은 서구 모더니즘을 이끈 자극제의 하나였다.

15세기 말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는 풍부한 향신료와 함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정교한 기술과 찬란한 문명, 그리고 부유한 교역망을 확인했다. 배에 싣고 간 유럽의 상품과 선물은 현지에선 찬밥신세였다. 이는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됐다. 자존심이 상한 다가마는 그다음 항해에 더 좋은 선박과 상품, 그리고 더욱 정교한 지도를 가져갔으며 강력한 대포도 함께 실어갔다.

고대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차지하고 교역으로 번성하던 기원 1세기의 모습을 간직한 채 화산재에 묻힌 폼페이에선 이집트는 물론 고대 인도에서 온 신의 조각도 발굴됐다. 다양한 문화의 섭렵과 이를 통한 문화 하이브리드 현상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문화 융성의 동력이었다.

문화는 때로 기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용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천부인권을 가진다’는 자연권 사상은 처음엔 서구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됐다. 하지만 이런 사상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뒤 1791년 카리브해 식민지 생도맹그의 아프리카계 노예를 자각시켜 또다른 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예제 폐지와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세운 첫 국가인 아이티의 독립이 벌어진다. 지은이는 이처럼 자연권 사상을 서구 남성의 자산이나 소유물로 여기는 사람이 없듯이, 모든 인류 문화는 고유성과 함께 보편성이 함께 공존한다고 강조한다.

지은이는 문화적 다양성이 지속될 수 있도록 다음 세대에 영감을 주는 문화·인문학 교육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정체성·이해관계 충돌, 상반된 신념을 둘러싼 갈등이 보편 문화와 다른 공동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원제 Culture: The Story of Us, From Cave Art to K-Pop.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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