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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세이지,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모두 아꼈던 유일한 지휘자

중앙일보

입력

2009년 일본 오사카에서 말러 교향곡 2번을 지휘했던 오자와 세이지. 사진 AFP=연합

2009년 일본 오사카에서 말러 교향곡 2번을 지휘했던 오자와 세이지. 사진 AFP=연합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동시에 사랑한 유일한 지휘자. 6일 별세한 일본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는 백인 지휘자 일색의 지휘계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동양의 마에스트로였다. 88세.

6일 별세한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보스턴과 빈의 오랜 지휘자

오자와는 무엇보다 보스턴의 지휘자였다. 1973년부터 2002년까지 29년 동안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보스턴의 인근 레녹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세이지 오자와 공연장’이 1994년 지어졌다. 일본 소니의 회장이 이 이름을 조건으로 공사비 2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보스턴 다음은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2002년부터 2010년까지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당대의 거장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레너드 번스타인의 가르침을 받은 유일한 지휘자였다. 오자와는 1959년 보스턴 탱글우드에서 쿠세비츠키상을 받으면서 카라얀의 눈에 띄었다. 베를린으로 건너가 카라얀의 장학금을 받으며 지휘를 공부했다. 이때 번스타인이 그를 발탁해 뉴욕필의 부지휘자로 불렀다. 1961년부터 63년까지 뉴욕에 머물렀는데 64년에는 다시 카라얀의 초청으로 베를린필을 지휘하며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다. 또 같은 해에 시카고 심포니의 라비니아 페스티벌 예술 감독이 된다. 번스타인의 추천이었다.

이처럼 그는 당시 백인 남성이 주를 이루던 지휘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해 주목받은 동양 지휘자였다. 나풀거리는 머리, 구슬 장식의 목걸이를 흰색 터틀넥에 건 채 무대에 서서 오케스트라를 정교하게 이끌었다. 1979년에는 보스턴 심포니의 중국 투어를 주도하면서 문화 사이 장벽을 허무는 상징으로 기록됐다.

동양 지휘자에 대한 편견도 겪어야 했다. 그는 1980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 ‘토스카’를 지휘하던 중 야유를 받은 일에 대해 “이탈리아 사람들이 동양 지휘자가 ‘토스카’를 지휘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기억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대담집에서다. 뉴욕타임스는 그의 부고 기사에서 ‘아시아 음악가들의 롤 모델이었지만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 않은 지휘자’라고 했다.

오자와는 일본의 점령지였던 중국 선양에서 태어났고 9세에 일본에 돌아왔다. 어린 시절 피아노를 공부했지만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었다. 도쿄의 도호 음악학교에서 사이토 히데오에게 지휘를 배웠으며 1984년에는 스승을 기리며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의 설립을 도왔다. 24세에 프랑스 브장송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고,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샤를 뮌쉬의 초청으로 보스턴 심포니의 탱글우드 여름 음악제에서 지휘를 공부하게 됐다. 그가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눈에 띄게 됐던 곳이다. 이후 그는 그래미상을 2회 수상했고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으며 케네디 센터의 명예 음악가로 선정됐다.

2010년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여러 합병증으로 무대에 제대로 서지 못했다. 하지만 2022년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고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을 지휘한 장면으로 전 세계 청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공연은 우주 정거장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의 우주 비행사에게 생중계를 위한 것이었다.

한국에는 1993년, 2004년 빈 필하모닉과 함께 내한했으며 2007년 빈 국립 오페라와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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