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동안 '기획자' 되는 연주자들…상주 음악가 제도 활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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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피아니스트 김준형. 한 해 4회의 공연을 기획해 연주한다. 사진 금호문화재단

올해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피아니스트 김준형. 한 해 4회의 공연을 기획해 연주한다. 사진 금호문화재단

“어느 날 아침에 전화를 받고 정말 놀랍고 좋았어요.”
피아니스트 김준형(27)은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던 날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제안을 받고 곧장 아침 연습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금호아트홀, 롯데콘서트홀, 마포아트센터 #피아니스트 김준형, 첼리스트 한재민 등 상주 음악가로 선정 #연주만 하지 않고 공연 방향과 기획까지 맡아

그가 기분 좋게 받아들인 제안은 하나의 비어있는 도화지와 같다.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는 한 해 동안 공연 4번을 기획해 연주한다. 연주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음악가로서 자신의 색채와 철학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 상주 음악가로서 연주자는 일종의 기획자, 프로그래머가 된다. 젊은 음악가들에게 만만치 않은 일이다. 김준형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처음에는 그동안 연주하고 싶은 작품들을 넣고 싶어 욕심을 부렸는데,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힘을 잃었다. 백지상태로 돌아가 나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작곡가 6명을 고르며 프로그램을 쌓아 올렸다”고 했다.

젊은 연주자들이 올 한해 공연장의 상주 음악가로 활약한다. 롯데콘서트홀은 첼리스트 한재민(18)을 앞세웠다. 마포아트센터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24)이 상주 음악가로 활동한다. 이들은 혼자 연주하는 독주부터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하는 무대까지 기획해 음악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김준형은 2022년 독일 ARD 국제 콩쿠르 2위 수상으로 이름을 알린 피아니스트다. 그는 “저를 알고 계신 청중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며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선정한 올해의 주제는 ‘엽편소설’. 단편보다 짧은 소설의 이야기가 60분 정도의 공연 한 편에 담기는 장면을 상상했다고 했다. 이달 11일 첫 공연에서는 바흐ㆍ베토벤 등 독일의 작품을 연주했고, 5월에는 일본 피아니스트 유키네 쿠로키와 이중주를 연주한다. 8월에는 플루티스트 김유빈, 첼리스트 문태국과 드뷔시를 들려준다. 마지막 공연인 11월에는 ‘종’이라는 주제로 직접 스토리를 만들어 종소리와 관련한 음악을 배치했다.

롯데콘서트홀의 인 하우스 아티스트인 첼리스트 한재민. 사진 롯데콘서트홀

롯데콘서트홀의 인 하우스 아티스트인 첼리스트 한재민. 사진 롯데콘서트홀

롯데콘서트홀의 상주 음악가인 한재민은 10대에 국제 콩쿠르를 휩쓴 경력의 첼리스트다. 에네스쿠 콩쿠르, 통영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제네바 콩쿠르에서는 3위에 입상했다. 그는 홀로 무대에 오르며 공연을 시작한다. 3월 27일 여는 무반주 첼로 독주다. 존 윌리엄스, 가스파르 카사도, 죄르지 리게티, 졸탄 코다이의 독주곡들을 골라 2000석의 대형 공연장에서 혼자 연주한다. 10월에는 3중주다. 피아니스트 박재홍,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토프 바라티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드보르자크,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트리오를 들려준다.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은 마포아트센터에서 4번의 각기 다른 무대를 기획한다. 7ㆍ9ㆍ10ㆍ12월에 열리는 독주회, 야외무대, 협연이다.

상주 음악가(Artist-in-residence) 제도는 미술 분야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작가들이 새로운 작업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공간ㆍ자원을 제공한다. 한국의 상주 음악가 제도는 2013년 금호아트홀이 시작했다. 당시 금호문화재단의 음악사업 팀장이었던 박선희(전 국립심포니 대표)는 “젊은 음악가들이 1년 동안 자신의 세계를 펼치면서 집중적으로 성장하고, 팬층도 집중적으로 발굴하는 개념이었다”고 소개했다.

마포아트센터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사진 마포문화재단

마포아트센터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사진 마포문화재단

금호아트홀은 그해 피아니스트 김다솔을 시작으로 선우예권ㆍ박종해, 바이올리니스트 박혜윤, 양인모,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등이 상주 음악가로 활동했다. 2019년 박종해는 ‘플레이 그라운드’로 한 해의 주제를 설정하고 변주곡만으로 구성된 무대 등을 마련했으며, 2021년 김한은 재즈 스타일의 음악까지 끌어들였다. 양인모는 2018년 상주 음악가로서 연주한 파가니니 카프리스 전곡을 녹음해 음반으로 냈다. 금호문화재단 음악사업팀의 김규연씨는 “솔로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 아티스트와 협업이 특히 중요한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롯데콘서트홀은 2021년부터 상주 음악가인 ‘인 하우스 아티스트’를 선정했다. 피아니스트 이진상은 지난해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의 피아노 버전을 미디어 아트와 함께 무대에 올렸다. 당시 이진상은 “상주 음악가의 무대는 그동안 연주자도 잘 접하지 못하고 관객도 체험해보지 못한 시도를 할 기회”라고 했다.

해외에서는 공연장보다는 오케스트라, 음악 축제가 상주 음악가를 선정해 협력하는 경우가 많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4/25 시즌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게 됐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은 물론, 실내악 무대까지 서게 된다.

상주 음악가의 관건은 음악가로서 철학을 보여줄 수 있는 주제와 방법이다. 뉴욕 필하모닉은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바흐의 독주곡부터 스페인 음악을 한 자리에서 소개하는 등의 음악 큐레이팅을 보여준다.

베를린필의 23/24 시즌 상주 음악가인 바이올리니스트 리사 바티아시빌리는 조지아 태생의 13세 피아니스트를 무대에 소개했다. 베를린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열두 살에 떠나온 고국 조지아에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클래식 음악 바깥의 분야에서 아티스트를 선정해 협업한다. 현 시즌의 상주 아티스트는 인도 악기인 ‘사로드’의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수미크 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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