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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렬의 시시각각

정치에 직무유기 책임을 묻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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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수석논설위원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NYT)의 ‘한국은 소멸하고 있나’ 칼럼은 0.7명대로 떨어진 한국의 저출생 문제를 ‘중세 흑사병’과 비교해 충격을 줬다. 칼럼에서 가장 섬뜩했던 대목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 경고였다. “한국이 유능한 야전군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합계출산율 1.8명인 북한이 어느 시점에선가 남침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란 내용이었다. 2022년 현재 한국군 병력은 50만여 명, 북한군은 128만여 명이다. 우리 병력은 2014년만 해도 63만여 명이었다. 8년 새 13만 명이 줄었다. 인구 감소는 예정된 미래다. 산업 현장은 외국인 근로자로 채운다고 해도 국방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군의 핵심 대책은 무기와 장비의 첨단화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군인이 한다. 드론과 인공지능(AI)이 잔뜩 동원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병력이 승패의 결정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 반대에도 중대재해법 확대
개혁신당 고질병 대책 적극 제시
시대적 과제 해법 찾는 정치 돼야

한국 정치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위기가 오는 걸 보면서도 대비하지 않고 정쟁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도 그래서 맞았다. 한국에 신뢰를 잃은 국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데도 여야는 금융개혁법 처리를 기피했다. 대통령 선거 때 노동계 표를 의식해서였다.

그래서 이준석의 개혁신당 정강정책의 문제의식이 반갑다. 우리 사회의 ‘회색 코뿔소’ 같은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준석은 “경찰, 소방, 교정 공무원이 되려면 남성과 여성 관계없이 병역을 마칠 것을 의무화하겠다”며 ‘여성 신규 공무원 병역 의무화’를 제안했다. 물론 찬반 논란이 뜨거울 사안이다. 그렇더라도 병력자원 급감은 현실이고, 지금이라도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준석은 “개혁신당은 표가 떨어질 수도 있지만, 미래를 대비해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맞다. 그것이 정치의 도리다.

개혁신당의 1호 정책은 KBS, MBC 등 공영방송 사장 임명동의제다. ‘10년 이상 방송 경력’의 자격 조항도 있다. 방송의 편파성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 장악을 위해 ‘내 편’을 사장으로 내리꽂는 구태만큼은 청산해야 한다. 공영방송이 집권의 전리품이 돼선 안 된다. 낙하산 사장이 앉은 그 방송을 상대 진영 다수 국민은 불신하고, 방송사 내부에선 진흙탕 진영 싸움이 벌어진다. 언제까지 이런 악습의 반복을 봐야 하는가.

개혁신당 정책 중에는 정치권 행사에 기업 총수들이 무분별 동원되는 것을 막는 ‘떡볶이 방지 특별법’ 추진,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와 책임 및 지원을 규정하는 ‘대통령 배우자법’ 제정도 있다. 시쳇말로 참 신박한 발상 아닌가. 되기만 하면 나라 모습을 보다 선진국답게 만들 수 있다.

기성 정치의 효용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유예 불발로 한계에 달한 느낌이다. 많은 산업현장이 열악하다. 영세 사업장일수록 사업주의 각성과 안전조치가 긴요하다. 2022년에만 재해 사망자가 644명이었는데, 60.2%(388명)가 50인 미만 사업장 소속이었다. 문제는 현장에서 법을 지킬 수 있느냐다. 적용 대상 소규모 사업장은 83만여 개, 근로자가 800만 명이다. 한 조사에선 94%가 준비가 덜 됐다고 답했다. 많은 사업주가 처벌의 공포에 떨고 있다. 사장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게 중소 사업장 현실이다. 안타까운 근로자 죽음을 막자는 것이 법 취지지만, 폐업과 해고의 날벼락으로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 정부와 여당(국민의힘) 책임이 크다. 법 제정 후 3년간 준비를 제대로 안 했다. 그렇다면 야당(민주당)은 역대 최강의 의회 권력을 쥐고서 무엇을 했나. 대비를 소홀히 해 온 집권세력과 예상되는 부작용을 외면하고 유예를 거부한 야당, 양쪽 모두 직무유기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근로자는 회사에서 쫓겨난다.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마침 총선이 다가온다. 책임 묻기에 딱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