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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하의 시시각각

DJ가 왜 거기서 나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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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정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김정하 논설위원

긴 목록이 이어지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말 바꾸기 리스트에 또 하나의 굵직한 사례가 추가됐다. 원내 과반 정당의 대표로서 선거제 개편의 열쇠를 쥔 이 대표는 지난 5일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 선거제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연동제의 취지를 살리는 통합형비례정당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통합형비례정당이란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상 민주당의 위성정당을 만들겠다는 얘기를 에둘러 한 것뿐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월 5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와 위성정당 창당을 선언했다. [중앙포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2월 5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와 위성정당 창당을 선언했다. [중앙포토]

이 대표는 대선후보 시절이었던 2021년 11월 “개혁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당이 정치적 손익을 계산하며 작은 피해에 연연하여 위성정당 창당 행렬에 가담하여 국민의 다양한 정치 의사 반영을 방해하고, 소수정당의 정치적 기회를 박탈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깊이 반성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면서 ‘위성정당 방지법’ 제정까지 약속했다. 그랬던 이 대표가 2년3개월 만에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겠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위성정당 깊이 반성한다던 이재명
2년여 만에 말바꾸기 사례 또 추가
DJ 명언이 말바꾸기 알리바이용?

정치인이 유불리에 따라 말을 달리하는 것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다만 문제 삼고 싶은 지점은 이 대표가 결정 배경을 설명하면서 “서생(書生)적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으로,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한 대목이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란 표현은 1960년대 6회 국회 때 김대중(DJ) 당시 민주당 의원이 남긴 유명한 어록이다. 정치인은 철학에 기반한 이상을 추구해야 하지만 현실적인 제반 환경도 늘 함께 고려해 움직여야 한다는 취지다.

2022년 1월 25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경기 남양주 유세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면 상대가 반칙해도 우리는 정도를 갔어야 했다"며 반성 메시지를 내놨다. 당시 그는 "'상대가 반칙했는데 나도 하면 어떠냐'며 (위성정당 창당을) 해서 우리가 국민의 지탄을 받았고, 약속을 어겨 '말만 하고 실천은 안 한다'고 비난받았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2022년 1월 25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경기 남양주 유세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으면 상대가 반칙해도 우리는 정도를 갔어야 했다"며 반성 메시지를 내놨다. 당시 그는 "'상대가 반칙했는데 나도 하면 어떠냐'며 (위성정당 창당을) 해서 우리가 국민의 지탄을 받았고, 약속을 어겨 '말만 하고 실천은 안 한다'고 비난받았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그런데 이번에 이 대표의 말 바꾸기에는 상인의 현실감각이야 넘친다고 쳐도 어떤 서생적 문제의식이 담겼다는 건지는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준연동형을 유지했으니 조금이나마 역사의 진보로 봐달라고? 그러려면 위성정당을 만들지 말아야지, 위성정당을 만드는 순간 준연동형은 제도의 취지 자체가 완전히 상실되는 것 아닌가. 이건 마치 소주 2병을 마신 뒤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던 사람이 4년 뒤 소주 1병을 마시고 또 붙잡혔는데, 지난번보단 혈중 알코올 농도가 절반으로 줄었으니 많이 좋아졌다고 자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대표는 DJ의 이 어록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는 2022년 8월에도 ‘꼼수 탈당’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민형배 의원의 복당 필요성을 강변하면서 “서생적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상인의 현실감각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말 DJ가 그럴 때 쓰라고 한 말이었을까. 당시 민 의원은 ‘검찰수사권 완전박탈’ 법안 통과를 위해 민주당을 위장 탈당한 것이고, 이는 국회법 정신을 모독하고 법규의 허점을 악용한 몹쓸 행위였다. 여기에서 서생ㆍ상인 운운하는 건 황당한 난센스다. 심지어 그 검수완박법이 지금 좋은 평가나 받고 있나?

이재명 대표가 2023년 9월20일 민주당 의원들에게 체포동의안 부결을 촉구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 그는 불과 석달 전엔 국회 연설에서 불체포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재명 대표가 2023년 9월20일 민주당 의원들에게 체포동의안 부결을 촉구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 그는 불과 석달 전엔 국회 연설에서 불체포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 대표는 예전부터 말이 자주 달라진다. 그는 지난해 6월 국회 연설에서 “저에 대한 정치수사에 대해 불체포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석 달 뒤 자신의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에게 부결을 호소하는 글을 올려 말 바꾸기란 비판을 받았다. 그는 2021년 12월 경북 칠곡에서 “전두환도 공과가 존재한다”고 말했다가 좌파 진영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그러자 이틀 뒤 “전두환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라며 톤을 확 바꿨다. “존경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라고 했다가 “존경한다고 했더니 정말 존경하는 줄 알더라”고 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상황에 따라 이 대표의 말이 뒤집힌 케이스는 수두룩하다.

정치인의 말 바꾸기는 다 사정이 있을 것이고 결국 국민이 평가할 몫이다. 다만 그럴 경우 “말 바꿔서 정말 죄송합니다”는 사과만 하고 끝냈으면 좋겠다. 공연히 DJ 어록까지 끌어와 말 바꾸기에 철학적 분칠을 하는 건 듣기가 영 거북하다. DJ가 말 바꾸기의 알리바이로 쓰라고 남긴 말은 아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