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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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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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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에 저장된 전자정보를 탐색하면서 ‘유관 증거만 선별해 복제·출력하고, 혐의 사실과 관련 없는 전자정보의 임의적 복제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위법하다.” 검찰의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가 불법적으로 이뤄졌다고 판사가 지적했다. 이어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압수수색은 위법하고, 위법한 압수수색으로 취득한 증거들 및 이를 근거로 작성되거나 진술한 증거들도 위법 수집 증거에 터 잡아 획득한 2차 증거여서 모두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삼성 수사에 법원이 “법 절차 위반”
법 어겼다니 감찰이나 수사를 해야
대통령에게도 마땅히 물어볼 사안

2019년 5월 검찰은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을 압수수색했다. 바닥에서 서버와 노트북 등을 찾아냈다. 그 모든 것이 수사 자료로 쓰였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영장에 적시한 범죄 혐의 관련 부분만 복제 또는 출력해 선별적으로 압수해야 했다. 하지만 검찰은 ‘범죄 은닉’의 증거라며 모조리 압수했다. 일반 범죄 피의자로 예를 들면, 집에서 발견된 노트북의 모든 내용을 검찰이 샅샅이 들여다본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검찰 수사관이 회사나 집에 들이닥쳐 서류와 컴퓨터를 마구 들고나가지만 그것은 쌍팔년도에나 가능했던(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이다. ‘무차별 압수’로 확보한 자료를 수사에 활용하면 검찰이 재판에서 진다. 법원은 ‘위법 수집 증거’ 문제에 예민하다. 검찰권의 무분별한 사용을 그렇게 통제한다.

5일의 삼성 회계 부정 등에 대한 재판에서 법원은 전 삼성 미래전략실 임원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도 위법 수집 증거로 판단했다. “압수 대상이 아닌 정보까지 영장 없이 취득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장주의와 적법 절차의 원칙을 중대하게 위반한 것”이라고도 했다. 영장이 허락한 범위를 넘는 압수였다는 뜻이다.

그제 재판부는 이재용 회장 등 사건 관련 피고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회계 부정에 대한 판단이 검찰과 달랐다. 그리고 검찰이 위법하게 확보했다고 본 자료들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회계 기준에 대한 견해차는 있을 수 있다. 전문가들 의견도 갈린다. 검찰 논리에 앞뒤가 안 맞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회계 부정으로 볼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에 비해 수사 절차의 문제는 분명하다. 수색영장을 내준 법원이 해당 영장의 범위를 넘는 압수였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여러 차례 ‘위법’이라고 했다. ‘적법 절차 중대 위반’이라고도 했다. 국법이 무시됐다는 의미다. 위법 행위를 확인하고 처벌하는 게 검찰의 책무다. 자신들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사든, 감찰이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이 재판과 관련해 어제 “기소할 때 내가 관여한 사건이 아니다”고 말했다. 군색하다. 그는 문제의 압수수색이 벌어진 시절에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지휘 라인에 있었다. 서양에서 ‘검사’라는 직책이 고안될 때 그들의 주요 임무는 법을 무시한 수사와 기소를 막는 것이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5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1심 선고도 있었다. ‘재판 개입’에 대한 혐의는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일부 유죄는 행정적 권한 남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지난달 26일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대법관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검찰 수사에서 1심 판결까지 약 6년이 걸렸다. 무리한 수사라는 여론이 법조계에 비등했는데, 결론이 47개 혐의 전부 무죄다. 그래도 검찰 측에선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재판을 다시 해보자며 항소했을 뿐이다. 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의 시작이다.

삼성 수사의 실무 책임자는 주요 국가기관 수장이 됐다.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들도 승승장구해 검찰 요직에 있다. 재판 개입 의혹을 수사했던 검사들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자회견이 있다면 마땅히 물어볼 일인데, ‘녹화 대담’으로 대체됐다. 오늘 방송되는 그 대담에 법원에서 뒤집힌 ‘적폐 수사’에 대한 질문이 있었을까?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