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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공인의 꿈,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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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실장

사귀는 사람이 결혼 상대로 긴가민가할 때는 2박3일 같이 등산해 보라는 인터넷 우스개를 본 적이 있다. 힘들 때 인간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이유였다. 이 우스개에 달린 댓글 중 하나는 “그런 테스트가 필요한 사이라면 헤어지는 게 낫다”였다. 인간관계든 신앙이든 시험은 들지 않는 게 좋은 법.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이 주시받는 정치인들이야 그럴 수 있겠나. 명예와 권력이라는 보상을 위해 ‘시험 듦’을 자청하는 행위가 정치 아닌가.

이재명 대표 헬기 특혜 뜻밖 논란
새삼 돌아보게 되는 공인의 무게
공익과 사익의 경계에 선 정치인
용산·여당도 당면한 무거운 질문

이재명 민주당 대표 피습 사건은 당사자도 모른 채 치러진 시험이었다. 다급한 상황 대처가 뜻하지 않게 응급의료 체계 붕괴, 헬기 특혜 이용 논란으로 번졌다. 이 대표 본인과 민주당으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했을 게다. 위급한 상황이었으면 사건 현장인 부산에서 수술받아야 하고, 위급하지 않았으면 응급헬기를 타지 말았어야 한다는 비판은 나름 논리적 정합성이 있다. 지방의료 홀대 불만까지 녹아 있는 예민한 문제다. 사태를 키운 것은 측근들의 경솔함이었다. “잘하는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는 정청래 최고위원의 말이 사태를 키웠다. 개딸로 상징되는 민주당의 사당화 현상이 빚어낸 몰감각이다. 오버액션으로 충성을 과시하는 사(邪)가 낀 측근을 가려내는 능력도 정치 공인이 치러야 할 시험이다.

사람은 어려울 때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제3자가 쉽게 할 말은 아니다. 모든 정치인 보고 총을 맞고도 “내가 피하는 걸 깜빡했소”라는 농담을 던졌던 로널드 레이건이 되라고 할 수는 없다. 피습 대처 논란은 곁가지 문제다. 본질은 당연히 폭력과 증오의 정치다. 이런 불행한 일에서조차 관용과 품격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진 세상이 문제다. 이 대표로서도 각박한 인정을 서운해하기보다 통합과 치유의 노력을 게을리했던 자신의 정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새삼 느끼는 것이 공인이 짊어진 무게다. 시험은 공인의 숙명이다. 이에 따르는 비난과 시비는 감수해야 할 비용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쓴 풍자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비난은 유명해진 사람이 대중에게 바치는 세금”이라고 했다. 한국 정치의 비극 중 상당수는 ‘유명세(稅)’를 ‘유명세(勢)’로 여긴 리더들의 착각에서 비롯됐다. 흐릿한 공사의 경계선 위에서 편리하게 공인의 권세와 사인의 익명성을 함께 누리려던 행태가 문제였다.

시선이 용산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더 혹독한 시험에 든 것은 여권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배우자를 겨냥한 특검법을 거부했지만, 여당으로선 이 문제가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할 뜨거운 감자가 됐다. 야당은 “사상 초유의 가족을 위한 거부권 행사”라며 국민의 공정 감정선을 자극하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여의도 문법과 사뭇 다른 화법으로 이런저런 행보를 보이지만, 최종 시험대는 결국 이 문제다. 이 허들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외면한다면 그의 뒤에 붙은 ‘용산 아바타’란 꼬리표는 떼기 힘들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친 한국 사회에서 공정은 이제 거의 신앙에 버금가는 화두가 됐다. 갈수록 닫혀 가는 기회의 문 앞에서 공정에 관한 대중의 민감성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하키 남북단일팀 구성 때 빚어진 논란이 대표적 예다. 민족, 평화, 통일 등 아무리 좋은 뜻도 공정이라는 기준은 넘기 힘들다는 것이 입증됐다. 결정적으로는 조국 사태였다. 공인과 사인의 경계를 줄타기했던 스타 정치인의 행태가 대중의 환멸로 이어지며 민주당 정부의 재집권이 가로막혔다. 물론 공정 개념이 단순하지만은 않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는 ‘비례의 원칙’과 약자가 배려받아야 한다는 ‘보편의 원칙’이 충돌한다. 그러나 공정의 당위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둘러싼 여야 대립도 결국 공정성 인정 투쟁이다. ‘총선을 겨냥한 거대 야당의 불공정한 횡포’로 인식될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부당한 권력 행사’로 비칠지의 싸움이다. 문재인 정부는 울산시장 개입 사건, 조국 사태 등을 거치며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취임사 구절을 블랙 코미디로 만들어버렸다. 윤 정부는 그런 위선의 극복을 표방하며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출범했다. 지금 그 가치가 제대로 구현되고 있다는 데 동의할 국민은 얼마나 될까. 거부권 행사 반대가 훨씬 많은 여론조사는 뭘 말해 주고 있는가.

공익과 사익의 충돌에서 용산과 여당이 어떤 선택을 할지 국민이 보고 있다. 정세균 전 총리가 이재명 대표에게 ‘절벽에서 손을 놓으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낭떠러지에서 손 놓으라는 게 죽으라는 말은 아닐 게다. 끝까지 잡고 있는다고 수가 생기는 건 아니라는 현실적 고언이다. 키신저는 “위기에는 가장 대담한 방법이 때로는 가장 안전하다”고 했다. 비단 야당 대표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